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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Dec 13. 2022

김장김치와 청국장이 내어주는 자존감

  찬 바람이 불면 새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김치냉장고의 여닫음은 한결 분주해진다. 봄부터 겨울의 초입까지 네 계절에 거쳐 느리게 익혀둔 지난해 김치는 김치냉장고를 벗어나는 순간 각기 다른 요리가 된다. 어느 날은 고춧가루를 더 넣어 칼칼한 김치찌개가 되고, 또 다른 날엔 된장을 뭉근히 풀어 짭조름하고 야들야들한 된장 김치찜이 되어 뜨끈한 한 끼를 완성해준다. 간편하게는 잘 익은 김치를 잘라 참기름 한 바퀴 둘러서 손으로 조물조물 무친 후, 통깨를 뿌려 두부와 함께 담아내면 개운한 한 접시가 만들어진다.        


   

  겉 보기엔 속이 꽉 찬 데다 선명한 붉은색을 네 계절 동안 단단히 담아온 김치가 완고해 보이지만, 김치는 이렇게 유연하다.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않으며 다양한 재료들과 허물없이 어우러져 또 다른 요리를 만드는 데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는다. 그리고 마지막 포기까지 김치는 최선을 다한다. 김치는 어떤 요리보다 자존감이 높은 게 분명하다. 그래서 김치를 먹은 젓가락을 놓으면 내 마음이 든든해지는지도 모른다.          



  배추 끝이 단단히 여물고, 단맛이 올라오는 초겨울이 되면 생생한 배춧잎은 네 계절을 함께할 반려 재료들을 만난다. 엄마들은 며칠 몇 달에 걸쳐 빨갛고 고운 고춧가루, 신선한 새우젓, 마늘, 파, 그리고 통통한 굴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최선의 재료를 모은다. 곱게 갈고 다진 재료는 넉넉한 통에 한데 모여 살살 섞이며 알싸한 냄새가 울려 퍼진다. 거실보다 알싸함이 더 크다. 그렇게 거실에서는 빠알간 일 년 농사가 버무려진다.       


    

   40여 년의 숙련된 전문가인 엄마들의 손은 저울을 단 듯 감각적으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최적의 양념의 양을 알고 있다. 손으로 집어 배추 한 잎 한 잎을 떠들어 뿌리 끝까지 성실하게 빠알간 양념을 발라준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배추가 가진 가장 큰 잎으로 나머지 작은 잎들을 야무지게 감싸 묶어준다. 그렇게 빠알간 한 포기씩의 김치 꽃이 완성되면 직육면체이기만 했던 김치통에 가지런히 김치가 담긴다. 지금부터 의미 없던 직육면체는 사계절 동안 배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김치 통이 되었고, 배추들은 40여 년의 숙련된 전문가의 엄마들 손을 거친 마스터피스가 되었다.      



  드디어 오늘, 김장김치가 식탁에 올라오는 날이다. 나는 엄마의 최선이 담긴 김장김치에 대한 예우를 다하고자 아끼는 접시를 꺼냈다. 김치의 색이 잘 보이는 흰색 타원형의 접시는 오늘의 김장김치를 담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양과 크기이다. 김치를 가지런히 오리고 그 위에 검정깨를 섞은 통깨를 넉넉히 뿌렸다. 빨간 김치 꽃이 우리 집 식탁에 올랐다. 내 마음이 뿌듯해진다.          


 

  김치와 최고의 궁합은 더할 나위 없는 흰 밥이다. 찰기 어린 윤기가 반듯한 햅쌀을 김치 옆에 놓으니, 이 순간 나는 너무 부자가 된 듯하다. 평소 건강을 생각해서 현미와 잡곡이 들어간 밥을 먹더라도 오늘은 김치가 주인공인 날이다. 그렇다면 김치가 가장 돋보일 수 있도록 오늘은 흰밥을 기쁘게 지었다.        


   

  그리고 혹시나 욕심에 김치를 잔뜩 먹어 위가 놀랄까 싶어 준비한 청국장. 뽀얀 쌀뜨물에 멸치 육수를 진하게 내고 달디 단 겨울 무를 충분히 넣었다. 그리고 된장 조금을 넣어 간을 맞추고 한 소끔 끓인 후 청국장 한 스푼을 듬뿍 넣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네모지게 썰어둔 보드라운 하얀 두부와 초록 대파를 넣고 잠시 냄비의 뚜껑을 닫는다. 맛있어져라. 뜸을 들이며 맛의 주문을 외우는 시간.


                

  창 밖엔 이미 청국장의 냄새를 맡았는지 추운 바람이 창문에 붙어있다. 청국장에서 꼬릿함보다 구수한 냄새가 올라오는 것을 보니 틀림없는 겨울이다. 그리고 나는 창문 하나 사이에 놓고 이 김장김치, 청국장, 흰쌀밥과 함께 집 안에 있다. 한 겨울의 호사는 모두 우리 집 부엌에 놓여있다.


          

  세 식구가 둘러앉아 흰쌀밥과 쭉 찢어둔 김장김치를 크게 한 입 먹는다. 입에서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서로 어색할 생생한 배춧잎과 빨간 양념이 서로 도드라지는데, 서로 아웅다웅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알싸한 아웅다웅에 흰쌀밥이 눈처럼 내리면 모두 다 무죄. 숟가락은 가볍게 고소한 청국장으로 향하고 따뜻한 위로를 받는다.


          

  연말이면 앞다투어 많은 레스토랑들에서는 시즌 요리들이 선보여진다. 우리에게도 자부심과 자존감이 남다른 시즌 그리팅 요리가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이듬해를 위해 준비된 김장김치. 지금은 단독으로 개별적인 빨간 맛을 고슴도치처럼 세우다가도, 계절과 함께 숙성되어 유순해지면 된장과, 고춧가루와, 참기름과 언제나 조화될 준비가 되어있는 시즌리스 요리. 엄마들의 자부심과 숙련, 그리고 최선이 담겼기에 먹는 사람도 든든해지는 요리.


           

  단언컨대, 김장김치는 아무에게나 허락된 음식이 아니다. 엄마들은 최선의 마음을 자식들을 위해 나누어준다. 이 가치를 알만한 사람, 고마운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음식이다. 단언컨대, 김장김치를 누군가에게 받았다는 것은 당신은 그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당신에게 고마워한다거나, 당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거나, 당신을 염려한다는 것. 그리고 당신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당신은 사랑받고 있다는 뜻이다. 누구도 누군가의 최선을 아무나에게 나누어주지 않는다.



  엄마는 더 가져가라고 한다. 매운 냄새를 맡아가며 허리를 구부리고 만들었을 그 수고는 없었다는 듯 더 가져가서 먹으라고 말한다. 그 말에는 여전히 나는 사랑받는 아들이고 딸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 담겨있다. 회색의 겨울을 보내고 지친 몸을 식탁에 앉혔더라도 김장김치 한 장을 먹게 된다면 이렇게 생각해도 된다. 세상은 살만하구나, 그래도 내가 행복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나는 충분히 따뜻함을 느껴도 되는 사람이 된다.

마흔이  나는 오늘도 이렇게 부모님 덕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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