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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Dec 18. 2022

눈먼 행운 대신 낙관을 꽉 쥐는 날

낙관은 행동과 함께 온다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드디어! 평소 나는 눈이 온다고 하면 출근과 등교 시간의 차 막힘,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차가 미끄러지면 어쩌나 하는 긴장, 무엇보다 사고에 대한 아찔함이 먼저 떠오르는 겁쟁이 중년이었다. 하지만 요즘엔 사정이 다르다.



  겨울 내내 우리 지역의 상수도원인 댐은 30%가 밑도는 저수율을 보였다. 덕분에 매일 아침 세수를 하고 이를 닦으려는 순간! 띠링! 하고 알림 문자가 도착했다. 오늘의 저수율은 27.86%로 고갈 위기이니 내년 장마까지 물 절약을 실천하자는 내용.



  문장은 짧고 단정했지만, 숫자가 주는 단호함은 도끼눈을 뜨고 내가 물을 쓰고 있는 걸 매섭게 감시했다. 나는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겨울의 호사를 누릴 때마다, 설거지를 하고 손을 씻을 때마다 내가 물을 낭비하고 있는 건가, 나 때문에 내일의 저수율은 또 얼마큼 내려가려나 하는 죄책감을 애써 모른 척해야 했다. 물을 아껴 쓰고 싶지만, 샤워는 해야겠고, 설거지도 해야겠고 손도 씻어야겠는걸 어떻게 해요.



  생각해보면 나는 이런 생각을 지난 주말에도 다. 친구들과 송년 모임을 가진 , 와인을 얼마 마신  같지도 않은데 취해버렸다. 하필,  저녁에  몸의 알코올 효율은 쓸데없이 높아버렸다. 취해서 조금밖에  놀게 되어 억울했던 그날, 나는 바랬다. 술은 마시고 싶지만 취하고 싶진 않아요.



  그리고 더 자주 나는 바란다. 많이 먹고 싶지만 살찌고 싶진 않아요. 나의 바람과 달리 내 몸은, 정확히 말하면 나의 배는 나이를 먹을수록 윤리의 실천가가 되어간다. 그래도 이십 대 때는 입력값 대비 산출량이 좀 적었던 것 같은데, 사십 대인 지금은 입력한 만큼 볼록한 배로 산출된다. '아니 왜? 나만 먹었어? 왜? 그래도 이 정도는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배가 또 나온 거야? 자비가 없네.' 볼록 나온 배를 원망하면 늘 말한다. 먹었잖아.



  이런 도둑 심보가 처음은 아니었다. 공부는 안 하고 싶지만 성적이 좋았으면 했고, 연습은 안 해도 운이 좋아서 결과가 좋기를 바랐다. 일은 안 하고 싶지만 돈이 많았으면 했고, 치우기는 귀찮은데 뾰로롱~하고 집은 깨끗했으면 하고 바랬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마음의 도둑은 늘 실패했었다.



  시험기간이면, 벼락치기를 하느라 수명이 단축되는 듯한 위의 긴장과 일시적인 시력 감퇴 증상이 있어야 성적이 괜찮았다. 강의를 위해서는 하루 전부터 어떤 약속도 잡지 않고 강의자료 준비를 하고, 강의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내용을 곱씹었을 때 집에 가는 차 안에서 고작 내 작은 차를 채울 만큼의 작지만 밀도 높은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귀찮음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킨 다음, 내 두 발과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허리를 여러 번 접고 펴며 청소기를 돌리고 물건을 치워야 집이 잔잔히 평온해졌다. 그리고 나는 일을 해야 그만큼의 돈을 버는 사람이었다.



  눈먼 행운은 내 삶엔 없었다. 참 고단한 사실이지만 참 다행인 세상이기도 하다. 내 행동이 결과의 질을 결정해왔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 고단한 정직함은 내 삶이 꽤 믿을만하다는 믿음을 쥐어준다. 내가 공부를 하고, 준비를 하고, 창문을 열면 결과가 달라진다. 드라마틱한 큰 성공이 아니더라도 이전보다 더 나아지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믿음은 내가 또 도전하고 시도하고 시작할 마음을 꽉 쥐어준다.



  내 삶에 눈먼 행운은 없었지만, 행동을 해온 덕에 나는 낙관을 가졌다. 하면 어떻게든 결과가 주어진다는 그 낙관은 다양한 모습으로 내 삶에 잔잔히 흩어져있다. 때론 다 잘될 거야! 하는 터무니없는 기대를 담은 모습이기도 했고, 내가 그때 한 선택이 괜찮았지, 그 덕분에 배웠지 하며 과거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낙관이 가진 가장 다행인 모습은 내가 패배를 경험했을 때였다. 마주한 패배 앞에서 내 자존감이 발톱 끝에 겨우 매달려 있기를 며칠째 지속하다 보면, 문득 차가운 마음의 바닥에서 희미한 낙관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곤 했다.

'행동했으니 패배한 거야. 그것만으로도 근사해. 그리고, 또 할 거잖아.'



  물론 그 낙관의 아지랑이는 정말 자세히 보아야 겨우 보인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낙관의 아지랑이를 경험한 밝은 눈은 그 어렴풋한 기회를 잡아낸다. 그리고 믿는다. 낙관은 느리더라도 꼭 한 번은 찾아온다는 것을. 그 낙관의 손을 잡을 때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나는 더 나아진다.



  황현산 선생님의 글을 좋아한다. 아니, 보여주신 세상을 읽게 됨에 감사한다. 선생님께서 쓰신 책에는 나의 낙관을 어른의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주는 문장이 있다.

"큰 승리의 약속이 없는 작은 패배는 없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속상한 아이가 엄마를 보는 순간 꾹 참고 있던 울음이 터지듯 마음이 울렁거렸다.

  


  나는 자주 패배할 것이다. 내 행동으로 인하여. 그래서 다행인 패배들이 낙관으로 가는 길에 내가 할 일은 내 행동을 그 사이에 배치하는 일이다. 먹어서 배가 나올 테니 그 사이에 걷기를 해볼 것이다. 술을 마셔도 더 즐길 수 있도록 그 사이에 밥과 물도 챙겨 먹고, 상대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보려고 한다. 그리고 좋은 글을 읽고 성실히 쓰며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보려 한다.



  오늘도 나는 세수한 물을 받아 발도 씻고 필요한 만큼의 물만 쓰는 불편한 생활을 계속한다. 하지만 이젠 내 절약 행동에 대설주의보라는 덤도 함께이니 죄책감은 덜고, 내 행동을 좀 더 컨트롤할 수 있겠다는 낙관이 생긴다. 좋은 일은 함께 있을 때 힘이 세지니까. 그리고 낙관은 행운이 아닌 행동과 함께 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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