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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Jan 01. 2023

마흔에 달게 된 금배지

  서른부터 마흔을 꿈꾸었다. 사주를 볼 줄 아셨던 고모께서 어릴적 내게 말씀하시길, 마흔이 되면 금배지를 단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 너무나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평범한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그날 이후 나는 그 말을 늘 호주머니에 담고 다녔는데, 이 말은 은근한 기대와 용기를 심어주었다. 아니 마흔이 되면 얼마나 굉장한 일이 내게 펼쳐지는 걸까! 내가 도대체 얼마나 근사한 사람이 되려고 이러는 걸까? 나는 서른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 안정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마흔을 기다렸다.



  내 삶은 너무 평범했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날들 속에서 그래도 한 번쯤은 내가 빛나는 날도 있기를 바랐다. 고흐와 모네, 로뎅의 작품에 한참을 넋을 놓고 보고 난 후 오르세 미술관을 등지고 나오며 나는 질투가 났었다. 제 삶을 자신 그대로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부러움이 그 이유였다. 도무지 눈치챌 수밖에 없는 재능과 자기다움으로 삶을 채운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나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삶을 살기에 나는 두드러진 재능을 찾기가 어려웠고, 순응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도무지 감출 수 없는 재능이 없다면 어떻게 좀 스쳐 지나간 재능이라도 찾아봤어야 했는데, 내게 집중해서 내 길을 고집하기에 나는 주변 눈치와 상황의 무게를 더 크게 느꼈다. 그렇게 좋게 좋게 타협해왔기에 내 삶은 무난했다.



  그렇게 서른이 되었다. 나의 사춘기는 아마 서른부터였던 것 같다. 이제 좋은 사람이 되기 싫었다. 거절을 먼저 시작했다. "싫다."는 말을 하게 된 순간 내가 더 선명해졌다. 싫은 것들을 걷어내니 좋은 게 무엇인지 보였다. 저 밑에 어렴풋하게 또는 인식하지도 못한 채 가라앉아있던,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결정이되어 떠올랐다. 그것들을 나는 꽉 움켜쥐었다. 다행히 그동안의 타협으로 나는 어느 정도 벌어놓은 돈이 있었고, 그 돈들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볼 수 있는 시작을 열어주었다.



  "대학원은 왜 다녀?"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지방국립대 박사가 대학에 임용이 되는 것도 어려운 현실인 데다 정년이 보장된 직업에 결혼해서 아이도 있는 서른 중반의 늦깎이 대학원생에게 당연한 물음이었다. 공부란 언제나 성취가 있어야 인정받는 일이니까. 나는 그런 질문을 받으면 가볍게 응대하고자 이렇게 말하곤 했다.

  "취미로 다녀요. 다른사람들이 해외여행다니고, 골프치고, 쇼핑하고, pt하듯이 저는 그게 공부예요. 학비도 그렇게 많이 들지 않아요."



  그러다 박사과정에 진학할 때 지도교수님께서도 여러 질문의 마지막에 같은 질문을 하셨다.

  "왜 박사과정을 하려는 거죠?"

이 질문은 달랐다. 그전 질문의 '왜'에는 그 필요없는 공부를 왜해?였다면 교수님의 질문에 담긴 '왜'는 다르다. 어떤 공부를 더 하고 싶은지, 본인 인생의 큰 가치인 공부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물음이었다.



  이 질문에 박사과정을 진학하려는 면접자는 멋진 대답을 했어야 했다. 석사 때 연구했던 행복연구의 주제를 아동에 더 맞춰보고 싶다거나, 어떤 변인을 좀 더 연구해보고 싶다고 멋진 포부를 밝혔어야 했다. 하지만 불쑥 이런 말이 나와버렸다.

  "자연스러운 것 같아서요."



  어쩌면 '지방국립대 박사'라는 것은 나의 아이덴티티가 아닐까. 소극적이고 현실에 타협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는 나는 유학이라는 원대한 꿈보다는 내 삶의 터전에 있는 학교를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렇게 나는 지방국립대를 진학했다. 나는 꿈이 크지도, 내 고집으로 가족을 부담스럽게 할 만큼 용기가 있지도 않았다.



  박사는 내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성취가 보이지 않는 박사를 내가 왜 하는 것인지 의아해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대체로 공부라는 지난한 고난의 시간은 단단한 성취가 보장되었을 때야 겨우 딜이 이루어지는 비싼 기회비용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원 공부는 내 삶에서 내가 막연히 하고 싶은 것을 주변 시선에 상관하지 않고 밀어붙였던 유일한 일이었다. 그럴 수 있었던 큰 이유는, 학비를 대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나였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냥,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내 삶의 바운더리 안에서 부릴 수 있는 고집을 부려본 서른을 지나 마흔이 되었다. 2022년 내 마흔은 참 아름다웠다.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비록 금배지를 달지는 못하고 마흔을 보내버렸지만, 내 마흔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로만 꽉 채운 한 해를 보냈다.



  아침에 여덟 살 등교를 시켜주고 집에 돌아오면 클래식 fm을 틀고 그 느긋함의 속도에 맞추어 커피를 마셨다. 배우고 싶어 시작한 새로운 강의 준비에 며칠을 보내고 밤늦게 불을 끄지 못했던 많은 깊은 밤에도 하기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 강의마다 나는 잘 가르치기 위해 새로운 생각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라이딩 맘으로 간식을 챙겨서 아이 학교와 학원 사이를 오갈 때에도, 차 안에서 네 계절을 느껴야만 했던 시간도 참 좋았다. 나는 아이에게 내가 필요한 순간에 옆에 있어줄 수 있어서 감사했다. 나는 매일 다른 간식을 만들어 아이에게 짠하고 내보여주며 "엄마의 기쁨이야!" 하며 내 행복을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시간들 사이에 나는 이렇게 글을 쓰곤 했다.



  내가 진정 바라는 삶이 나대로 사는 것이라면, 나는 마흔에 그렇게 살았다. 적어도 내 마흔은 내가 하고 싶은 일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내 시간을 내가 컨트롤했고, 읽고, 쓰고, 배웠고, 아이 옆에 있어주었다. 간식을 준비하며 기대했고, 지루한 기다림 끝에 아이를 만나면 새롭게 반가웠다. 오며 가며 노래를 함께 부르며 우리는 즐거웠다.



  다른 사람에게 공부가 성취를 위한 일이라해도 나에게만은 공부가 취미이자 자연스러운 일이듯, 금배지도 나만의 정의가 필요하겠지 싶다. 내 마흔의 금배지는 아마도 드디어 나답게 살게 된 기회가 아닐까. 내 꿈이었고 내가 부러워했던 삶은 관료제의 금배지가 아니었다. 나는 나대로 살게 되는, 자신의 재능과 욕구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삶을 원했다. 그게 나의 금배지라면 마흔의 2022, 나는 그렇게 살았다. 어쩌면 2022년을 나는 내 삶의 잔잔한 황금기로 꽤 오래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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