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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Jan 02. 2023

겨울 섬초 시금치가 쥐어준 초록 에너지

  "아, 맞다! 남편! 섬초도 한 봉지 사다 줘!"

  계절음식을 먹는 것은 그 계절의 향과 질감을 온몸으로 불러들이는 일이다. 한 겨울이 무르익는 계절이 되면, 나에게 가장 반가운 1번 재료는 초록의 단맛 섬초이다.



  겨울의 초입부터 나는 설레발을 치며 마트의 채소 코너를 기웃거리다가 섬초를 발견하면 사 오곤 한다. 하지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의 시금치는 평소 시금치와 섬초의 중간쯤에 머무른 채 아직 여물지 않기가 대다수이다. 섬초의 아는 맛을 기대한 나는 이내 반가움이 적잖은 실망으로 변하곤 한다. 더 기다리는 수 밖에. 기다리며 시간의 힘에 더 기대어본다.



  그러다 하얀 눈이 내리고 찬바람이 충분히 세차게 불었다 싶을 때, 그때는 완연한 섬초의 제철이다. 그때만큼은 마트에 가기를 참 귀찮아하는 나조차 겨울바람에 실려 명랑한 걸음으로 마트에 간다. 확실한 목표는 하나, 나의 초록, 나의 겨울 제철 식재료! 섬초를 만나기 위해.



  안녕! 섬초! 너의 계절이 왔구나! 섬초는 그 모양부터 일반 시금치와는 다르다. 연두와 초록 사이의 연약하고 길쭉한 일반 시금치와는 달리 섬초는 안쪽은 개나리 같은 밝은 노랑부터 시작해서 바깥 부분으로 갈수록 진한 초록빛에 단단함이 엿보인다. 잎사귀도  여느 시금치는 끝이 둥글둥글한데 반해 섬초의 잎사귀는 좀더 구불구불한 크리스마스 트리의 삼각형 모양에 가깝다. 줄기의 생김새도 섬초만의 고유성이 두드러지는데 민들레 잎이 바닥에 닿아 자라 사방으로 편편하게 뻗쳐있듯이 섬초의 줄기 역시 방으로 쭉 뻗어있다. 아마도 세찬 바람에 버티느라 단단한 초록 손가락을 쫙 펴서 땅을 꽉 움켜쥔 게 분명하다. 찬 바람과 눈을 맞으면서도 땅에 남은 온기를 끝까지 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초록은 더 단단해졌고, 단맛은 더욱 응축되었다.



  이 여린 초록이 지난 강한 생명력은 다정하기도 해서 자신이 응축해놓은 초록의 에너지를 추운 겨울을 지내는 내게도 나누어준다. 단단한 섬초의 줄기와 잎을 만지고, 씹을때마다 나는 생생한 진한 초록의 에너지를 얻는다. 사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잎은 잎이다. 이 여린 아이도 한겨울을 이렇게 살아냈으니 마땅히 나의 겨울도 괜찮을 거라는, 나도 햇살과 바람을 모으는 중이라는 위안을 건네준다. 이때 섬초가 아낌없이 내어주는 아삭한 질감과 은은하고 맑은 단맛은 귀하고 고마운 덤이다.



  오늘은 여덟 살의 방학 첫날.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 하다가 꾀가 생겼다. 편하게 가보자 싶어서 김밥을 사서 컵라면을 먹어야지 싶었다.

  "주윤! 오늘 방학 첫날이니까 컵~~~ 라면 어때? 특식이야. 그리고 김밥을 곁들여 먹는 거지!!"

  "좋아요! 오예! 그럼 김밥은 싸 먹는 거지요?"

  "응!? 사 먹어야지. 어떻게 싸?"

  "엄마! 어제 시금치 샀잖아요."



  하... 내 꾀에 내가 넘어갔다. 쉽게 가려다가 김밥을 싸게 되다니. 하지만 동시에 나는 기대가 돼버렸다. 냉장고에 듬뿍 넣어둔 섬초김밥이라니! 김밥은 자타공인 나의 소울푸드이다. 집에 김밥이 있다면 나는 뇌에 산소가 부족해진 게 분명할만큼 몽롱해질 정도로 김밥을 먹어치우는 데다, 김밥이란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사 먹는 메뉴이다. 내 최고의 메뉴에 내 최고의 겨울 제철 섬초라면! 이건 하나도 귀찮지 않은 일이 된다. 섬초의 초록 에너지가 갑자기 나에게 내린다. 그렇다면, 이건 일도 아니지!



  "좋아! 그러고 보니 냉장고에 재료가 다 있어! 심지어 진짜 신기한 건 뭔 줄 알아?"

  "뭔데요?"

  "주윤이가 싫어하는, 맛살만 없어!"

  "오~~~ 좋아요!"

  "그렇지? 신기하고 완벽해!"



  나는 신이 났다. 오늘의 주인공인 섬초를 제일 먼저 준비하기로 했다. 냉장고의 초록 섬초를 꺼내 흐르는 물에 씻는데 그 빠득빠득한 초록의 생생한 잎은 여전히 빳빳했다. 만져보아도 느껴지는 그 초록의 생명력이 좋았다. 섬초를 데친 물에서 초록이 묻어 나왔다. 그 묻어 나온 초록이 개수대로 흘러가는데 못내 아쉬웠다. 섬초 앞에 나는 이렇게 욕심쟁이가 된다.



  주황 당근과 노랑 단무지를 채 썰고, 베이지색 햄을 길게 썰었다. 당근과 햄을 볶은 후 노란 보름달 같은 지단을 부쳐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2장의 지단은 반달 또는 초승달에 그쳤으나, 다행히 그 뒤에 부쳐낸 지단은 보름달이 맞았다. 동그랗게 노오란 보름달 지단만큼 내 보람도 동그랗게 커져갔다.




  "주윤아! 엄마가 쌀까? 직접 만들 거야?"

  "엄마! 제가 할 거예요!"

  김밥 만들기를 좋아하는 주윤이는 하던 레고를 뒤로하고 냉큼 손을 씻고 식탁에 앉는다. 주윤이의 작은 손에 초록 섬초가 가득 쥐어진다. 하얀 밥 위에 초록 섬초가 올라간다. 겨울의 하얀 눈과 초록의 섬초가 만난 것 같다. 그때는 눈이 위, 초록의 섬초가 아래였겠지만 지금은 그 반대이다.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듯이. 노란 단무지, 주황 당근, 베이지 햄을 노란 지단에 먼저 말아두고, 김으로 다시 한번 돌돌돌 말아준다. 제 손으로 꾹꾹 눌러 마무리하는 것을 보니 우리 주윤이의 손도 나름의 경험이 모여 꽤 여물었구나 싶다.



  참기름을 김 위에 발라주고 칼로 김밥을 썰어낸다. 올망졸망 동그란 김밥 꽃이 통! 통! 하고 떨어져 나온다. 초록, 노랑, 주황, 하양 김밥 꽃이 주윤이의 입으로 들어간다. 아이쿠야! 좋아라. 엄마는 아이 입이 오물오물거리면 다 좋다. 뒤에 설거지 거리가 잔뜩 쌓여도 그냥 좋다.



  나도 한 입 먹어본다. 섬초를 듬뿍 넣은 겨울 김밥! 강인한 섬초의 향은 노랑과 주황들의 색 안에서도 오롯하고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섬초는 쌉싸름한 초록맛과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단맛을 움켜쥐고 있다가 입에서 씹히는 순간 빠짐없이 제 향과 맛을 내어주었다. 너그럽기도 하지.



  봄과 가을 소풍날의 김밥이 설렘을 담은 경쾌한 김밥이라면, 겨울 섬초의 김밥은 겨울을 지낼 힘을 건네주는 강하면서도 너그러운 김밥이다. 찬바람과 눈에도 땅을 움켜쥐어보았던 초록 잎이 건네주는 용기이고 끈기이고 낙관인 이 초록 에너지 덕분에 오늘의 겨울을 힘내어 보내본다. 이 아이도 해냈으니, 나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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