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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May 08. 2023

행복을 받치는 번거로움들

 첫 시험, 첫 출근등의 처음들 앞에서 나는 나를 참 많이 믿는다. 나는 시작도 전에 앞으로의 과정과 결과가 잘될 거라 기대하고 우주의 기운이 모인 듯 그 상황도 나를 도울 거라 믿는다. 그러다 보니 매 시작 전, 내 마음엔 기대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느라 바쁘다. 기대로 마음이 바쁘다 보니 다가올 일이 쉽게만 여겨진다.



   ‘잘될 거야.’하는 막연한 낙관과 기대들로 바빠진 내 마음은 아름다운 결과를 기대하는데 주력하느라 다른 여력이 없다. 촘촘한 기대들 사이에서 나의 준비는 느슨하다. 가끔은 타이트한 준비에 대한 생각 자체가 안나는 것을 보면, 준비라는 개념 자체가 무( )인 것 같기도 하다.  분명, 새로운 일인데. 나는 이렇게 일상의 고른 음표들 사이에 불쑥 솓아오른 높은음들에 대한 현실적 준비 대신 자주 희망에 찬 몽상가가 된다. 이런 내 성격은 때론 익숙한 노래를 불러오던 중 불쑥 높여버린 음에 덜컥 걸리곤 한다.



  이런 느슨한 나에게 하나씩의 생각이 붙었는데, 이 생각이야말로 느슨한 합리화에 맞춤형이다.

  ‘사람들이 뭐 나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겠어?’



  남동생의 결혼식을 앞둔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결혼식 당일 아침에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으러 가자는 전화였다.

  “몇 시까지 가야 하는데?”

  “엥!? 7시~8시 샵으로?”

  순간 그날 아침의 모든 번거로움들이 앞다투어 달려와서는 내 앞에 허들로 넘어졌다. 7살 아들 준비, 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운전하기, 주차가 어려운 곳에 주차 겨우 하기, 낯선 곳에서 헤어메이크업을 받기. 그 미션들을 해내고 고운 얼굴로 결혼식에 가기까지 나는 얼마나 익숙지 않은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할까. 이런 생각들은 자동적으로 스샤샥! 빠르게 부풀어 올랐고 나는 아쉬움이 없었다.



  “엄마, 나는 그냥 집에서 옷 입고 갈게.”

  “응? 그래도 직계 가족이고, 사람들도 많이 오는데 메이크업해야지 않아?”

  “사람들이 나 보러 와? 신랑 신부 보러 오지.”

  


  사람들이 나에게까지 쏟을 관심은 없을 거라 여겨온 나는 헤어 메이크업의 분주함 그 자체였다. 나는 여느 주말처럼 커피 한잔과 대화로 시작하는 게으른 주말을 꿈꿨다. 사실 일가친척들은 어릴 적부터 나를 봐온 사람들이라 명절에 꾀죄죄한 나를 더 자주 봤으니 그날 메이크업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합리화는 이럴 때 하라는 것이 맞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느슨한 준비성에 앞 일을 쉽게 보는 경향, 거기에 타인이 내게 별 관심이 없다는 자동적 생각의 연합은 꽤나 강력했다. 나는 시간을 벌었고 내 걸음은 느긋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이너피스의 순간을 자주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문제상황은 늘 편안했던 비슷한 일의 모양을 띄고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말갛게 등장해서는 등 뒤에 비수를 날렵하게 꽂는 법이다.



  “헤어메이크업은 여기서 받았어요.”

  대학생을 대상으로 영상으로 된 온라인 교육프로그램을 몇 차시 맡게 되었다. 녹화를 하기로 하기 며칠 전, 먼저 녹화를 하고 온 선배님께서 친절히 알려주셨다. 순간 또 그날 아침을 그려보았다. 10시 녹화예정이라 헤어메이크업 샵에는 최소한 8시 까지는 가야 한다. 하지만 아이는 8시 20분 등교를 시켜야 하는데? 물론 남편에게 하루 부탁하면 될 일이지만 아이 등교는 갑자기 절체절명의 중요한 일로 떠오른다. 게다가 겨울아침에 서둘러 샵에 갔다가, 주차하느라 분주할 생각을 하니...

  “전 그냥 가야겠어요.”



  그렇게 나는 또 대책 없이 나와 상황을 너무 믿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스크립트 빠짐없이 썼으니 분명히 전달하면 되지.'

  '대학생들이 내 얼굴 보겠어? 아무 관심 없지.'

  '사실 나도 연수 프로그램 볼 때 화면 내려놓고 딴짓하는데 뭘...'



  디렉팅을 봐주시는 선생님은 꽤나 세심하셨다. 머리카락 한 올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으셨다. 나도 나름 긴 생머리를 곱게 빗고, 앞 가르마를 타서 단정했다 여겼으나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평소 앞가르마 위로 잔디인형처럼 짧게 난 머리카락이 문제였다. 그는 내 잔디머리를 헤어제품으로 눌러주길 친절히 요청하셨다.



  난 앞 가르마 탄 머리를 헤어 제품으로 납작하게 정성 들여 쓰다듬으며 꾹꾹 눌렀다. 헤어는 볼륨이 생명이라 배웠는데. 서서히 느꼈다. 이건 아닌데. 또한 내가 설명을 할 때마다 옆 머리카락이 움직인다는 그의 말에 나는 옆머리를 모두 어깨너머로 넘겼다. 나는 너무, 참으로 납작하게 단정했다.



  그렇게 나는 조선의 도령이 되었다. 조명을 잔뜩 받은 얼굴은 보름달처럼 둥글게 떠올랐고 눈은 누가 조각칼로 한번 흔적만 남겨둔 듯한 실눈이 되었다. 코는 원래 없었던 듯 자취를 감추었다. 화면 속에는 납작하고 단정한 앞가르마에 실눈을 뜬 둥근 얼굴을 한 조선의 도령이 열심히 말을 하고 있었다.

'저게 나라고?'

  마치 나는 원래 저렇게 못생겼단다. 하고 확인시켜 주는 듯한 영상 안의 조선의 도령의 모습을 한 사람으로부터  내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내 이름이 박혀있었다. 납작한 조선의 도령으로부터 나오는 명랑한 목소리는 참 색달랐다.



  낙관(optimism)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과거의 경험이 참 좋았었지 하고 여기는 것도 낙관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미리 준비했던 사람이 겪은 분주함은 결과에 속속 스며들어 내 결과를 내가 만들었다는 만족감의 밀도를 높여준다.



  어릴 적, 엄마와 아빠는 더운 여름 계곡에 우리 삼 남매를 데리고 피서를 가곤 했다. 계곡에서 취사가 가능했던 시절, 우리 가족은 주로 수박과 라면을 먹곤 했는데 어떤 날은 백숙을 먹기도 했다. 그럴 때 내 기억에 선명한 소리 하나가 떠오른다. '치익 치익 치익!' 우리 텐트의 압력밥솥이 더운 여름보다 더 뜨거운 김을 온 여름에 발사하는 소리였다.



  이제야 보인다. 마흔이 갓 넘었을 삼 남매의 아빠가 메고 짊어지고 간 배낭 속. 텐트, 돗자리뿐만 아니라 압력밥솥까지 들어있던 그 무거웠을 배낭. 젊었던 엄마의 양손에도 수박, 코펠, 식기가 가득했을 것이다. 둘은 다섯 식구의 더 맛있고 즐거운 여름휴가를 위해 메뉴를 정하고 준비물을 배낭에 넣을 때, 그 계곡의 걸음은 염두치 않았을지 모른다. 아니 더운 여름 계곡으로 향하는 길의 힘겨움보다는 다섯 식구가 계곡에서 시원하게 물놀이를 하고 차가워진 몸을 뜨끈한 백숙과 라면으로 데워줄 생각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행복한 준비가 가득한 배낭을 멘 두 젊은 부부는 걸음이 더딘 삼 남매의 손을 번갈아 잡아가며 계곡을 올랐을 것이다.



  덕분에 마흔이 된 삼 남매는 여전히 그때 이야기를 한다. 그리곤 어쩜 그때는 백숙을 먹었을까! 하고 그래도 라면이 최고지! 하며 그때를 회상할 때마다 웃곤 한다. 엄마 아빠가 우리 나이였을 시절에 즐거운 기대로 준비해 주었던 여름의 기억은 여전히 우리 삼 남매의 행복하고 뜨끈한 기억으로 남았다. 꽉 찬 낙관이란 이런 게 아닐까.



  어쩌면 나의 준비 없는 기대는 가볍고 게으른 몽상이 아니었을까. 내가 가진 결과에 대한 기대라는 낙관이 묵직한 힘을 얻기 위해서는 결과가 있기까지의 과정도 만족스럽게 여겨져야 할 것만 같다. 번거로움의 깊이만큼 행복의 깊이도 깊어진다. 분주함의 면적만큼 행복도 잔잔히 넓게 퍼질 수 있다.



  꽉 찬 낙관을 가진 나를 바란다. 좀 더 분주하게 준비하며 미래를 기대하는 나는, 아마도 결과 앞에서 준비 과정의 만족스러움에 묵직한 행복을 쌓아갈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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