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내 안의 어린이가 만난 덕분에

by 주윤

안녕하세요. 좋은 봄 날입니다. 오늘 이곳을 오는 길, 조금 일찍 도착하고 싶은 마음에 늘 가던 길보다 빠른 길이 있을까 싶어 내비게이션을 검색했어요. 내비게이션이 제안하는 길은 늘 걸리던 시간보다 예상 도착시간이 10분 정도 단축되더라고요. 가벼워진 숫자를 보는 순간, 새로운 길에 대한 호감이 생겨났어요. 새로운 길은 어떤 길일까, 게다가 더 빠르다니. 그 길로 가보기로 결정했죠. 출발점은 같았지만 익숙한 길을 앞에 두고 좌회전을 해야 했어요. 전 이미 새 길에 대한 호감이 가득한 상태였잖아요. 좌회전 깜빡이를 켜는 손도 참 가벼웠어요.


여유롭게 시작된 새로운 길의 초입으로 부드럽게 진입하는 순간에도 저는 기대가 되었죠. 초입을 지나 한참 주행을 하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차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자연스레 내비게이션의 숫자들도 점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합니다. 숫자가 쌓일수록 새로운 길에 대한 제 마음의 기대는 덜어지고, 초조함은 커져갔죠. 이제 내비게이션이 데리고 온 새 길에 대한 단점들만 떠오릅니다.



사실 이 길은 원래 다니던 직선의 도심 대로가 아닌 천변을 끼고 달리는 우회도로였어요. 거리는 도심 대로보다 더 길지만 대신 교통신호등이 드문드문 있는 도로여서 차가 적은 상황엔 빠를 게 분명해 보였어요. 하지만 차가 쌓이는 우회도로 위에 정차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도로만큼 제 마음도 답답해지기만 합니다. 차 앞 유리에 쏟아지는 봄 볕은 급한 마음으로 앞을 노려보는 제 눈을 시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차 안을 가득 채운 답답함과 초조함의 검은 마음에 단단히 붙더니 곧 태워버릴 듯했어요. 작은 차 안은 점점 후텁지근해졌죠. 저는 재킷을 벗어 옆 자리에 놓고 선글라스를 쓰면서도 신경질이 났어요. 더는 못 참고 창문을 열었죠.



아. 이러면 안 되잖아요. 난 지금 바쁜데. 이렇게 예고 없이, 보드랍고 가벼운 연둣빛 봄바람이 훅 불어오면 어떻게 해요. 내 후텁지근함과 짜증을 이렇게 너그럽게 어루만져주면 어떻게 해요. 이러다 저 엉덩이에, 아니 봄바람이 닿은 모든 곳에 뿔이 나면 어쩜 좋아요. 앞을 노려보던 눈에 얹은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려 창 밖을 볼 수밖에요. 이건 봄바람이 내게 내린 봄의 명령과 같아요. 아니 이건 어쩌면 생존의 본능인지도 몰라요.



구불구불한 하늘빛 천변이 봄 볕을 받아 반짝입니다. 하늘빛 반짝이는 천변의 양 쪽에는 곡선의 들판이 다정하게 붙어있어요. 어쩌죠. 이미 그 들판엔 봄이 사뿐히 내려있었어요. 연둣빛 들뜬 작은 잎들이 명랑하게 내려앉은 봄의 들을 보니 별 수 있나요. 제 마음도 속절없이 들떠버릴 수밖에요. 그렇게 내비게이션은 저를 봄으로 데려왔어요.



봄바람은 이렇게 사고처럼 내게 다가왔어요. 사고가 나면 사고가 나기 전과 후가 질적으로 달라진다고 하죠. 다시 사고 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내 마음에 들어온 연두, 하늘, 노랑들이 제 마음에 명랑하게 울려펴집니다. 아무래도 봄의 색들은 차분하긴 틀린 것 같아요. 그 매력적인 들뜸의 손을 저도 냉큼 잡을 수밖에요.



천변을 지나 다시 도심의 대로로 들어섭니다. 이제 거의 다 도착이에요. 봄을 만나느라 겨우 정시에 도착했어요. 이런 늦은 거죠. 약속장소는 4층이거든요. 어쩔 수 없이 계단을 2개씩 뛰어올라 겨우 도착합니다. 숨이 가빠지네요. 운동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순간이죠. 하지만 허겁지겁 계단을 오를 때, 제 마음은 발보다 더 가볍고 명랑합니다. 저는 봄을 만나고 온 사람이거든요. 가볍고 다정한 노랑, 하늘, 연두의 봄을 마음에 담고 온 사람이거든요.



봄은 내 안의 어린이를 깨우는 것 같아요. 봄은 모두 연두빛깔로 까르르 웃고, 민들레 씨앗을 담은 채 가볍게 날아다니다 나를 보고 싱긋 웃어줘요. 그런 때면 내 안의 봄을 닮아 봄과 친한 어린이가 불쑥 튀어나와 봄과 가볍게 손을 잡고 뛰어다니는 것 같아요. 그러느라 나는 잠깐 딴짓을 해요. 분명 분주하고 바빴는데, 딴짓을 할 여유가 어디서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그 딴짓 덕분에 저도 잠시 싱긋 웃어요. 그렇게 봄과 내 안의 어린이가 만나 함께 놀다가 서로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새로운 내가 되어 내 일을 다시 시작해요. 즐겁게. 그리고 명랑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