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없이 1660만원 청구서가 날라옴
목요일 갑자기 지인으로부터 포뮬러 레이스 출전을 제안받아서 금요일 급히 월차를 내고 인제스피디움으로 갔다
카레이서인 지인이 출전 제안을 받았는데 시간이 안돼서 나를 추천했다고 한다
(참가 대수가 10대 미만인 경기에서는 종종 이런 경우가 있어서 나도 그리드를 채워주러 나가는 경우가 있다)
조건 없이 그냥 가서 타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 레이싱드라이버라면 무조건 가야 했다
내가 탈 포뮬러 머신의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
한국형포뮬러 KF4또는 KF1600이라고 부른다
외관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무상으로 타라고 초청해서 왔는데 일단 한번 타보기라도 하자고 마음먹는다
여기서 그냥 집에 갔어야 했다
첫 타임에 들어갔는데 브레이크가 거의 듣지 않았다
팀에 이야기해서 브레이크 상태를 보니 리져버에 오일이 없었다
기분이 쌔했다
이건 전반적으로 정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여기서 대형사고 안난 건 천운이다
여기에 그 독한 브레이크 오일을 넣는데 깔때기도 없이 바닥에 휴지 깔고 30cm 위에서 넘치거나 말거나 그냥 대충 부어버린다.
여기서 그냥 집에 갔어야 했다
에어브리딩을 다시 하고 들어가니 브레이크는 그럭저럭 들었다
하지만 주행 중 약간 젖은 노면에서 2코너 코스 안에서 다른차랑 부딪친 것도 아니고 혼자 스핀 했는데 후륜 오른편 서스펜션이 부서졌다
처참한 내구성이다
여기서 그냥 집에 갔어야 했다
하지만 고칠 수 있다고 내일까지 준비해 준다고 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미케닉 분들이 밤늦게 열심히 작업을 하셔서 다음날 아침에 차가 준비되었다
토요일은 웜업과 예선이 있다
다행히 별문제 없이 주행을 하고 예선4위로 좋은 위치를 확보했다
일요일도 웜업과 결승이 있다
웜업 주행을 하는데 마지막 코너에서 엔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연기가 뒤에서 났다
주행은 되길래 차를 세우지 않고 피트인을 했는데 오일을 바닥에 뿌리면서 들어와서 다른 차들에게 피해를 주고 만다
도대체 어떤 히스토리를 갖고 있는 엔진인지 알 수 없지만 마치 막판에 폭탄을 받은 느낌이었다
난 20년 차 레이스드라이버이고 그동안 사고가 아닌 이상 엔진이 문제 생긴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차를 망가트리지 않기 위해 항상 극도로 조심한다
레이싱드라이버는 차를 망가트리지 않는다는 평판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스티어링 휠에 쉬프트램프 나오는 데로 변속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흔한 데이터 로깅도 없는 차라서 뭐가 문제였는지 알 수도 없다
여기서 그냥 집에 갔어야 했다
엔진을 교체할 시간도 부품도 없었기 때문에 차를 바꿔서 특별출주 허가를 받아서 결승에 출전했다
웃긴 건 내가 최후미여야 하는데 뒤에 두 대가 더 있었다
결승전에 차가 문제가 생긴 드라이버가 나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었던 것이다
스타트하고 2코너에서 추월하다가 타 차량이랑 접촉을 피하려고 코스에서 바퀴한개 나갔는데 프론트 노즈가 부러졌다
이후에 한랩에 4초나 더 느린 랩타임으로 오전에 엔진 고장을 의식하고 엔진을 살살 돌리면서 완주만 하려고 했는데 9랩째에 익숙한 소리가 나고 다시 연기가 나면서 엔진이 죽었다 결승 3랩 남겨놓고
정말 웃긴 것은 내가 이때 2등이었다는 것이다
내 앞차들은 이미 거의 차량 고장으로 리타이어 했고 결승 출전한 차가 총 9대 중 완주한 차가 3대였다
완주율 딱 30프로 완주만 하면 포디움이다
완주가 힘든 뉘르24시 경기에서도 70프로이상은 나온다
여기에 경험많은 팀이 왜 그렇게 천천히 달렸는지 이해가 되었다
중계에서도 보면 나오지만 차들끼리 거의 아무 접촉도 없는 경기였는데 참 처참한 내구성이다
그리고 경기 끝나고 일주일 후 나를 초청한 팀에서 천육백만원짜리 청구서가 날아왔다
각 단계 단계마다 비용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이 말이다
(심지어는 드라이브샤프트 한개를 갈았는데 청구는 두개가 되어 있다)
국내/해외 레이싱 드라이버 생활 20년 동안 수많은 팀에서 레이싱카를 타봤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다
심지어는 나와 똑같이 결승전에 차량 고장으로 차를 바꾸고 결승에서 또 차량 고장으로 완주하지 못한 어린 일본 F4 시리즈 3위 선수가 있었다
다이스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을까? 청구서를 받기나 했을까?
포뮬러의 국산화 개발에 대한 노고에는 박수를 보낼 일이지만 고성능차와 레이싱카 개발 엔지니어인 내 의견으로는 KF4는 아직 개발이 끝나지 않은 프로토타입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보인다
이런식으로 경기를 하는 것은 레이싱카 개발비를 드라이버들에게 떠미는 것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술 더 떠서 부품을 국산화해서 그나마 수리비가 적게 나온 거라고 했다)
이런 글을 쓰게 되어 어려운 여건에서 경기하시는 기존 선수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경기를 준비하느라 밤새 고생해 주신 미케닉 맟 관계자 여러분들에게는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