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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장역사쟁이 Nov 07. 2016

세계유산 창덕궁에 가다.

성정각!




왕과 세자도 열공했어요!

'성정각(誠正閣)' 이란 말은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앞 글자를  따온 것이다. 성의란 순수하게 집중하는 것이고, 정심이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곳을 이용한 사람은 왕과 왕세자였다. 
이들이 순수하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렵다. 쉽게 이야기하면 왕이나 왕세자가 자기훈련을 하는 것을 말하며 더 쉽게 말하면 왕과 왕세자가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왕과 왕세자의 공부는 경연과 서연을 통해 이루어졌다.
성정각은 왕과 왕세자가 공부하는 곳이었다. 문의 이름도 현인을 맞이하는 문을 뜻하는 영현문(迎賢門)이다. 





영현문


성정각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다. 영현문은 현인을 맞이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성정각


성정각은 왕이 신하들과 경연을 하거나 세자가 서연을 하던 장소였다. 지금은 시멘트로 덮여 후원으로 가는 길로 사용되는 곳에 세자의 처소인 중희당(重熙堂)이 이었다.  


성정각 누각


성정각은 정면 6칸 측면 2칸 건물에 누각이 붙어 있는 건물이다. 누각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 남쪽에는 보춘정(報春亭)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보춘정은 "봄이 오늘 것을 알린다" 는 뜻으로 세자의 공부방을 뜻하는 것이다. 


보춘정, 희우루

 

희우루는 정조 대에 가뭄이 지속되었는데 이 누각을 짓기 시작하고, 완공되었을 때 비가 왔고, 왕이 이 누각을 찾자 또 다시 비가 왔다고 해서 희우(기쁨 비/단비)루 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희우루 편액


개인적으로 이 누각의 이름을 좋아한다. 한자도 똑같은 나의 딸 이름이다. '희우(喜雨)' 딸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름을 짓기 시작했다. 작명에 대해 알지 못하는 아빠는 뜻글자로 이름을 짓기로 하고 수개월에 걸쳐 만들어 낸 이름이 '희우' 이다. 단비처럼 꼭 필요하고 기쁨인 사람으로 자라기를 기대하면서...... 잘 커 줘서 고마워...... 딸아......


약방(내의원)의 흔적


성정각이 개방되어 관람이 가능해진 것은 2000년 이후의 일이다. 그전에는 개방되지도 않았고, 문밖에 안내판에도 성정각이 아닌 내의원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화재로 인해 순종이 창덕궁 후원으로 처소를 옮기면서 일제가 이곳을 내의원으로 사용했었다. 보춘정 앞에 있는 행각에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내의원으로 사용된 흔적이다. 편액의 글씨는 정조의 어필이라고 전해진다.

사극 허준에서 이곳이 내의원으로 나왔는데 잘못이다. 그 당시는 궐내각사 안의 약방이 내의원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집희(緝熙)
집희

집희 내부


내부에서 바라보는 맛이 좋을 것인데 들어가지는 못한다. 평상시에는 문이 꼭 닫혀있다. 가끔씩 통풍(습기제거)을 위해 개방한다. 오늘이 그날 인듯..
집희는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의 빛나는 덕을 계속해서 잇는다" 는 뜻이다. 이곳에서 왕과 신하들이 만나 경연을 했다고 한다. 원래의 이름은 관물헌(觀物軒)이었다. '집희' 편액은 고종이 13세 때 쓴 어필로 전해진다.
이곳은 많은 역사적 흔적을 품고 있는 데 정조가 '초계문신제' 를 시행한 곳이고, 효명세자의 경연 장소이기도 했으며, 갑신정변 당시 급진파 개화파의 본부로 청나라와 맞선 곳이기도 하다. 


창덕궁 후원 입구


현재 창덕궁 후원 입구인 이곳은 동궐도 상의 중희당이 있던 곳이다. 중희당은 세자의 처소인 동궁이었다. 넓은 월대와 마당의 사방에 전각과 담이 있었고 다른 전각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존재했었다. 지금은 대부분 영역이 시멘트로 덮여 있고 일부가 낙선재 영역으로 관리되고 있어 그 흔적 만을 찾을 수 있다.
후원은 자유 관람이 아니라 예약을 하고 해설사와 함께 관람해야 한다. 일찍 예약을 해야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관람할 수 있다. 사진의 상황은 예약한 단체가 이미 출발했고, 늦게 도착한 부부가 서둘러 도착하는 모습이다.


빈청, 어차고, 매점


희정당과 성정각 대각선 앞으로 건물이 하나 있다. 지금은 매점으로 이용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어차고' 로 소개되었는데 순종이 이용한 가마와 마차,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었다.(지금은 고궁 박물관 지하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이곳은 과거의 어차고나 현재의 매점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본래의 기능은 '빈청' 이다. 빈청은 정승 판서급의 고위 관리들이 궁궐에 들어왔을 때 머물던 공간이었다. 어차고에서 매점이라니......






세자도 피해 갈 수 없는 공부!

   

왕의 교육을 경연이라고 하는데 이는 왕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세종, 성종, 정조 같은 왕은 경연을 통해 자기 학식을 뽐내며 선생님(신하)을 곤란하게 하기도 했다. 태종은 핑계를 대면서 참여하기 싫어했지만 가끔씩 참여하기도 했다. 세조나 연산군은 경연 자체를 폐지해 버렸다. 종합하면 왕은 피해 가려면 피해 갈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왕세자는 달랐다. 피해 갈 수 없는 공부였다. 좋은 교육을 받으면 훌륭한 군주가 될 것이라가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덕성(德性), 예제(禮制), 체육(體育), 예술(藝術) 등 해야 할 공부도 많았다. 그냥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강' 이라는 시험도 통과해야 했다. 물론 결과가 왕에게 통보되기 때문에 책임도 뒤따랐다. 신분제 사회(왕조)에서 신분을 타고나듯이 공부 머리도 타고나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공부에 대한 세자들의 성향을 구분하면 
알아서 잘 한 세자(단종), 최고의 임금이자 학식 높았던 할아버지 세종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잘해야만 했던 세자(정조), 아버지 사도세자가 어떻게 죽음을 맞았는지 알고 있었다. 잘하지 못하는 순간을 노리는 정적들이 사방에 존재했다. 잘할 수밖에.....  

잘하다 못한 세자(사도세자), 아버지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했으나 넘치는 기대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처음부터 못한 세자(양녕대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무(武)적 기질 만을 이어받았나 보다. 어려서도 성인이 되어서도 공부는 뒷전이었다. 

역사를 배우는 목적 중 하나가 "역사를 통하여 배운다"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많은 부모의 1등 고민거리는 자녀 교육 문제다. 역사를 통해 배운다면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영현문(현인을 맞이하는 문)을 통해 들어온 현인들의 가르침을 받은 세자들 모두가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세자들의 성향에 맞는 교육을 시켰더라면 조선의 역사 전개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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