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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장역사쟁이 Oct 02. 2016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아들과 떠난 첫 번째 여행

아들과 떠난 첫 번째 여행

추억의 영주를 아들과 다시 찾았다. 본 목적지 경주를 한 번에 가기에는 힘든 여정이라는 핑계로 부석사를 또 찾았다. 영주 부석사! 많은 국보를 보유하고 천하의 절경을 볼 수 있는 곳, 좋은 곳이다. 그러나 이보다는 추억을 되살릴 수 있기에 좋은 곳이다. 
  부석사(浮石寺)는 8월에 들렸던 서산 개심사(開心寺), 언제 가봤는지 기억도 희미한 강진 무위사(無爲寺), 나의 본관인 부안 내소사(來蘇寺), 비구승의 사연을 안고 있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와 더불어 우리나라 5대 사찰로 꼽히는 절집이다. 이런 절집임에도 이 절집 자체보다 앞서는 것이 추억이다.
  대학 시절 마음 맞는 선후배와 눈빛이 통하면 훌쩍 떠나 도착한 곳이 영주의 부석사였다. 그 당시는 제2중부와 중부내륙 고속국도가 개통되지 않아서 참 먼여정이었다. 하지만 먼 곳이면 어떠랴? 마음 맞는 사람과 떠나는 여행인 것을......
  부석사 초입에 사과밭으로 둘러싸인 민박집에서 밤새 술을 마시고 이른 새벽 부석사에 올랐다. 당시는 석양을 볼 수 있는 부석사 보다 이른 새벽의 부석사를 좋아했다. 사실 부석사라기보다는 무량수전 앞으로 펼쳐지는 명품 절경을 좋아했다. 그 후 동아리 MT 장소, 답사를 빙자한 연애 장소로 참 많이도 왔던 곳이 부석사다. 그런 추억의 장소! 부석사를 아들과 찾았다.

태백산 부석사 - 일주문

   '태백산 부석사' 라고 적힌 일주문이다. 부석사가 자리 잡고 있는 산은 봉황산이나 넓게 보면 봉황산도 태백산 자락이다.

추억의 사과밭

  말 그대로 추억의 사과밭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 훌쩍 떠나온 부석사 입구 민박집에서 자연을 안주 삼아 술을 참 많이도 마셨었다. 이른 새벽 부석사에 오르면서 손을 뻗어 해장을 했었다. ㅋㅋ 반성!
  그때의 그 사과나무는 아닌 듯하다. 어린 나무가 밭을 차지하고 있다. 그때는 길가까지 빼곡하게 나무가 심겨 있었다. 사실 일주문을 오르는 초입에는 아직도 길가에서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탐스러운 사과가 열려 있다.

기념사진

  매표소를 지나 일주문이 나오기 전까지 은행나무 길이 이어진다. 마음은 사과밭에 가있지만 눈은 멋진 가로수길을 보고 있다. 가을에 노란 단풍이 들면 더욱 좋다.

당간지주

  절집에서 행사가 있을 때 절집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깃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고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 지주라고 한다. 당간은 나무나 철로 만들었고, 철로 만든 철당간이 더러 남아있다. 부석사의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아있는 다른 당간지주에 비해 키가 크고 날씬해서 통일신라 여인에 비교하는 이도 있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석굴암 본존불에 한 표를 던진다.

범종루

 부석사는 국보를 포함해 많은 역사 유물을 가지고 있다. 옛 맛을 느끼며 역사 공부도 할 수 있고, 무량수전에 오르면 명품 경치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도 점점 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새것, 날 것을 거부한다면 방법이 있다. 일주문을 통과해 오로지 직진을 하면 된다. 최근에 새로 지어진 건물들은 직진해서 오르는 곳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다. 일주문과 천왕문 빼고.....

전각의 이름은 범종루인데 범종은 없고 거대한 법고와 운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속되는 가파른 계단과 중간중간 누각 밑으로 나 있는 길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안양루

위로 보이는' 浮石寺' 현판은 이OO대통령의 글씨로 전해진다. 경복궁 '光化門' 편액을 한글로 '광화문' 으로 썼던 박OO대통령이 떠오른다. 문화재 훼손이라고 욱여본다......

석등

사방이 포토존이지만 이곳을 빼놓을 수 없다.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면 석등과 부석사의 '주인공' 무량수전을 만날 수 있다. 계단을 올라 석등 앞에 서면 석등 화창 사이로 '무량수전' 현판이 보이는 데 놓쳤다.
  범종각을 지나면서 아들이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했다. 그래야만 안양루에 올라 뒤돌아봤을 때의 절경을 더 깊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무량수전 앞 전경

어느 계절, 어느 시간대에 올라도 보답하는 절경이다. 많은 여행을 하면서 아이들이 차창 밖의 풍경을 보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밖의 풍경이 아니라 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폰이다. 아주 많이 단속을 하는 잔소리쟁이 아빠지만 항상 스마트폰을 빼앗을 수는 없다. 운전중임에도 멋진 경치가 나오면 "희치야 멋지다. 봐봐" 라고 한다. 그러면 대답한다. "와~~멋지다" 하지만 '영혼' 은 없다. 이런 아들이 스스로 웃었다. 자기가 본 경치 중 최고라고 극찬한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움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보이나 보다. 멀리 보이는 태백산백의 산줄기는 물줄기처럼 보인다.

무량수전 앞 전경

아들이 웃었다. 힘들게 올라왔지만 좋다는 뜻이다.

석등

높이가 3m에 가깝다. 지면부터 사각의 기단(하대석),  연화대석(복련/꽃잎이 뒤집힌 모양), 8각 간주석, 상대석(앙련/하늘을 보고 있는 모양), 화사석(석등), 옥개석으로 이어진다.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376년 중수(고쳐지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이만 많은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지어진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무량수전을 찾는 부류는 다양하다. 불교신자, 역사학자, 일반 관광객 등등. 그러나 건축가를 빼놓으면 안된다. 건축가들이 뽑은 가장 잘 지어진 건물, 1등으로 뽑힌 적도 있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건축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건물의 크기에 비해 간수가 적다. 기둥과 기둥 사이가 넓다는 얘기다. 지붕도 몸체에 비해 커 보이는 팔작지붕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갖고 있다. 그 비결이 배흘림 기둥 위에 주심포 양식의 공포를 두고 팔작지붕을 두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건축가의 장인 정신은 당연하게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배흘림기둥은 기둥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기둥이 굵어졌다가 다시 밑으로 가면서 얇아지는 형식이다. 기둥의 굵기는 위, 아래, 중간 순이다.

공포는 기둥 위에 두는 장치로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고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기둥 위에만 공포를 두는 것을 '주심포' 양식이라고 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두면 '다포' 양식이라고 한다. 
잘 짜인 공포는 몸체에 비해 크고 내려오다 올라가는 긴 추녀마루를 지닌 팔작지붕을 천년 넘는 세월 동안 버티고 있다. 천년 전 장인의 노고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무량수전 현판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략을 피해 안동에 머물다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면서 썼다고 전해진다.

부석

浮石은 뜰부에 돌석이다. "떠 있는 돌" 이라는 뜻으로 의상대사의 부석사 창건설화(?)와 관련된 돌이다.

무량수전
안양루

사진을 많이 찍어 시간이 흘렀다. 날씨도 도와주지 않았다. 무더위도 힘든데 비구름이 몰려왔다. 목적지 경주에 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내려오면서 생각났다. 조사당을 빼먹었다. 그래도 국보인데 다시 올라갈까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사실 조사당은 많이 변했다. 조사당의 얼굴인 벽화는 별도로 보관 중이다. 새로 그린 벽화는 낯설기만 하다.



의상, 선묘, 부석, 부석사, 석룡이야기

때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다. 당나라에 머물면서 선묘(善妙)라는 여인과 인연(아는 사이)을 맺게 된다. 
  배울 만큼 배운 의상대사는 10년 만에 귀국길에 오르고, 의상대사에게 마음(사랑?)이 있었던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기를 기원한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대사와의 인연을 이어간다. 의상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여 안전하게 귀국하게 하고, 부석사 창건에도 도움을 준다.
  의상대사는 귀국 후 왕명을 받아 봉황산 기슭(현 부석사 자리)에 절을 짓고자 했으나 그곳에 살던 이교도(異敎徒)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용으로 변한 선묘가 나타나 큰 바위를 공중으로 올려 이교도를 위협했다. 놀란 이교도는 달아났고 의상대사는 절집을 짓게 된다. 이때 들어 올린 돌을 부석(浮石)이라 하고 절집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로 했다고 전해진다.
  선묘의 사랑(?)은 계속된다. 부석사를 지키겠다며(의상대사에 한 표) 석룡(石龍)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앞에 묻혔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인 이야기를 잠깐 소개하면, 부석사 스님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무량수전 아미타여래좌상 대좌(부처가 앉아있는 곳) 밑을 용 머리가 받치고 있고, 몸은 'ㄹ' 자로 하고 있으며 무량수전 앞 석등까지 용의 몸이 이어져 있다는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무량수전을 수리할 때 앞마당에서 허리가 잘린 용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부석사 내에는 선묘를 모시는 선묘각이 있고, 이 이야기는 일본에도 알려져 자세하게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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