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지 돌이 말하는 것은?
황룡사는 진흥왕 때 짓기 시작한다. 황룡사의 얼굴마담, 황룡사 9층 목탑의 완성까지 포함하면 왕은 4대(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 시간은 근 100년 동안 지어진 것이다.
2만 평이라고도 하고 2만 5천 평이라고도 하는 넓은 터에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을 절집의 건물은 어디에도 없다.
한창 발굴 중인 곳에 차를 이용해 들어가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더 많고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없다. 기껏해야 분황사로 가는 길가의 당간지주 정도나 일반인들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그저 넓은 터에 규칙적으로 놓여있는 돌(초석/주춧돌) 뿐이다. 상상력을 동원해 돌 위에 건물을 올릴 수 있다면 당대 최고의 절집을 만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동행한 초등학생 아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 필요 이상으로 관심 많은 아들도 별 관심이 없다. 이럴 때는 할 수 없이 믿거나 말거나 인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선덕여왕 때 만들어졌고,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으로 소실되었다. 지금은 초석들만 남아있다. 목탑지 가운데 솟아 있는 돌을 심초석(심초석은 거대한 목탑을 세우고 무게 중심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이라고 하는데 목탑 건립의 주인공 백제인 '아비지'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비지 이야기
선덕여왕의 초청으로 탑을 만들기 시작한 아비지는 심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던 날 밤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후 아비지가 탑 만드는 것을 그만두려 하자 천지가 진동하고 사방이 어두워졌는데, 어둠 속에서 한 노인이 나와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를 본 아비지는 탑 만드는 것이 계속했다고 한다.
황룡사 목탑지의 초석은 정면과 측면 모두 8개씩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1칸이라고 하니 정면과 측면을 7칸으로 탑을 올렸다. 신라를 대표하는 3층 탑이 아니라는 것이 특이하다.
이는 1층부터 9층까지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 등 신라 주변의 아홉 개 나라를 상징하고 이들의 침략을 막아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이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황룡사지 발굴 결과 금당지가 3개이고 목탑지가 1개이다. 이를 3금당 1탑 형식이라고 하는데 이는 특이한 구조이다. 일반적으로 1금당 1탑이다. 황룡사 금당에는 솔거가 그렸다는 벽화가 있었다. 솔거가 뛰어난 화가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솔거 이야기
황룡사 금당의 벽에는 솔거가 그렸다는 노송도(老松圖)가 있었다. 그림의 소나무가 생동감이 넘쳐 새가 날아들었고, 앉으려다 미끄러지는 새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그림의 색깔이 퇴색해 한 승려가 새로이 색칠을 했다. 그 후로는 새가 날아오지 않았다고.....
진흥왕은 황룡사 자리에 궁궐을 지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황룡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궁궐 대신 절집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 속에서 황룡이 나올 것 같다. 억지.....
금당지 뒤로 황룡사역사문화관이 보인다. 건물을 짓기 전 신라시대 연못 터가 발굴되었지만 콘크리트로 매립 후 건물을 올렸다.
황룡사가 들어서기 전 이곳은 늪지였고, 진흥왕은 늪지를 메우고 건물을 올렸다. 따라 할 걸 따라 하셔야죠!
최근에 또다시 경주 지역의 유적 발굴이 도마에 올랐다. 현재 신라의 궁궐터로 알려진 월성 지역이 한창 발굴 중이다. 문제는 가시적인 성과에 집착해 세세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한국고고학회) 문제점을 지적하며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현 정부가 빠른 발굴 성과를 요구하고 있고, 관광자원 개발과 발굴 지원금을 최대한 많이 받으려는 경주시가 이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재 훼손의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전문가 집단과 시민단체 등이 반대하고 있지만 개선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경주의 문화재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걱정이 앞서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박 대통령이다.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