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레종?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무리가 중국인 관광객들이다. 서울의 궁궐과 주요 관광지나 역사유적지를 점령한 이들이 경주지역에도 나타났다.
볼만한 것 천지인 경주 지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 있다. 바로 경주국립박물관이다. 일단 무료입장이고, 덥고 추운 날씨를 피할 수 있는 쾌적의 장소이다. 볼거리가 많다는 것과 무료라는 점이 중국인 관광객을 안내하는 인솔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듯하다.
무더운 날씨 속에 하루의 일정한 소화한 우리도 마지막으로 경주국립박물관을 찾았으나 이미 중국인 관광객이 박물관 전시실을 점령 해 버렸다. 유난히 중국인을 싫어하는 아들을 설득할 수 없어 성덕대왕신종만 만나고 나오기로 했다. 공짜니까, 가능! ㅋㅋ
성덕대왕신종은 성덕왕(702~737)을 위해 지어진 봉덕사에 있던 종이었다. 절집이 폐허가 되면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975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져 왔다.
성덕대왕신종은 일반인들에게 '에밀레종' 으로 더 알려져 있다. 종을 만들 때 어린아이를 집어넣어 만들었는데 종을 칠 때 나는 소리가 아이가 그 어미를 부르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비로운(?) 이야기로 종이 유명세를 타는 것이 좋았을 수는 있으나 이 물건이 절집의 것이었기에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교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을 절집이 앞장선 것이기 때문이다.
논란을 잠재우고 단지 전설일 뿐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종의 성분 검사를 했고, 사람 뼈를 이루는 성분인 '인' 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안내문에 소개하고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이형(보통의 종과 다른 종/크기) 종으로 남아있는 종 중 가장 뛰어난 종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형(보통의 종) 종으로는 상원사 종이 유명하다.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을 위해 큰 종을 만들기 시작했다. 구리 12만 근으로 종을 만들려 했으나 결국은 실패하였다.
혜공왕이 왕위에 올라 종 만들기를 이어갔다. 역시 여러 번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정성이 부족함을 깨닫고(?) 종의 완성을 기원하며 가난한 집에서 시주한 아이를 넣어 주물(쇳물을 거푸집에 넣는 것)을 하자 아름다운 종소리를 가진 종이 만들어졌다.
범종의 외형은 밑에서부터 하대, 당좌와 비천상, 유곽과 종유, 상대, 종뉴(용뉴), 음통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에 보상화문과 연꽃이 새겨져 있다.
당좌는 종을 치는 자리를 말한다. 보통 연꽃을 새겨 자리를 표시한다.
양쪽의 당좌 사이에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공양하는 모습과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주로 새기는 데 성덕대왕신종에는 향로를 든 모습의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탁본쟁이인 나를 흥분시키는 비천상이다. 탁본해 놓은 것을 보면 비천상의 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멋지게 해낼 자신이 있지만 어림없다는 것 또한 안다. 그래도....
당좌와 비천상이 있는 높이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종의 제작 연대와 목적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명문의 내용은 종을 만든 경위와 삼국 통일 예찬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었다. 구리 12만 근으로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이 대력(중국 당나라 대종의 연호) 6년(771년) 12월 14일에 종을 완성했다."
"신종이 만들어지니 그 모습은 산처럼 우뚝하고 그 소리는 용의 읊조림 같아 위로는 지상의 끝까지 다하고, 밑으로는 땅속까지 스며들어 보는 자는 신기함을 느낄 것이요, 소리를 듣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보상화문(당초무늬?)이 새겨진 사각형을 유곽이라 하고 그 안에 아홉 개의 연꽃 무양을 종유(연뢰 또는 유두)라고 한다.
보상화문 띠를 두르고 있다. 상대 위로 종뉴(용뉴)와 음통(음관)이 위치한다. 종뉴는 종을 달기 위한 장치인데 용 모양을 하고 있어 용뉴라고도 한다.
음통은 중국이나 일본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우리나라 범종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소리를 조절하거나 탁한 음을 걸러내는 장치로 이해하고 있다.
음통이 만파식적(피리)을 형상화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종을 칠 때마다 음통(만파식적)을 통해 뻗어나가는 소리가 세상을 평화롭게 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수학여행이 경주 첫 방문이었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때 성덕대왕신종의 실제 종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종의 보존(?)을 위해 종을 치지 않는다.
한 시간에 두 번씩 녹음한 종소리를 들려주는데 이는 종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제 기능을 못하는 종은 벌의 집 역할을 하고 있다.
쓸데없는 소리 같지만, 지금이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일 종을 관리하는 책임자라면 지진으로 불안해하는 경주 시민을 위해 기꺼이 종을 치겠다.
불교와 기본적인 교리를 공유하는 종교로 '자이나교' 가 있다. 불교에 비해 고행을 강조한다. 승려들은 생명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음식물(물)을 섭취한다. 승려들이 이동할 때 빗자루(?)를 들고 앞을 쓸며 걷는다. 밟혀 죽는 생명체가 없게 하기 위함이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호국불교' 라는 특수성을 갖는다. 불교를 백성을 단합(사상 통일) 시키고, 국가를 지키는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기꺼이 승병을 조직해 군인들이 하는 행위를 했다. 살생을 금지하는 기본 교리를 깬 행위다.
호국이라는 특수성을 지닌 신라의 불교이지만 에밀레종의 전설과 같이 종을 주조하는데 어린아이를 희생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에밀레종 전설을 종이 신비롭게 보이도록 지어진 이야기로만 치부하기에는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는다.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보도록 하자!
신라의 조세제도 측면에서 접근하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추론도 가능하다. 신라의 백성들은 조세(토지세), 역(군역-군대, 요역-단순노동력), 공물(특산물) 등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이외에 국가가 필요한 물건을 수시로 납부했다.
성덕대왕신종을 만드는데 구리 12만 근이 들어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구리 12만 근을 순수한 국가 재정으로 충당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적다. 종을 만드는데 필요한 많은 양의 구리는 백성들에게 세금으로 떠 넘겨졌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은 부담이 없었겠으나 먹고사는 것도 힘든 사람들은 정해진 세금 외의 또 다른 세금은 궁핍한 살림을 더욱 힘들게 했을 것이다. 국가가 요구하는 세금을 거부하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도망 정도) 없는 살림살이를 처분하기도 하고 높은 금리의 고리대를 이용해 돈을 빌리기도 했을 것이다.
끝내 방법을 찾지 못한 사람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자녀를 귀족의 노비로 넘기거나, 자손이 귀한 집으로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마련한 돈(구리)으로 종을 만드는 목적으로 걷는 세금을 해결했다면 그 종소리가 에밀레종의 전설처럼 아이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로 들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