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메이트'와 함께하는 '소울푸드'
남편과의 주력(酒歷)
누구!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 엄마는 감, 우리 아들은 짜장면, 우리 딸은 망고.
그런데 나에겐 그런 딱 하나의 최애가 없다. 물론 좋아하는 음식은 정말 많다. 꽃게철이면 먹던 꽃게찜과 꽃게찌개, 일요일 아침의 김치수제비, 집에서 빚은 담백한 만두, 생일날에는 꼭 먹었던 미역국과 잡채, 비슷한 크기의 돼지고기와 애호박, 양파, 두부가 같이 어깨 들썩이는 고추장찌개까지. 대부분 엄마가 해주시던 음식들이니 소울푸드라고 불러도 손색없지만 하나만 꼽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날씨나 장소, 혹은 그날의 기분이 어떤 음식을 먹고 싶게 할 뿐 언제 어디서든 계속 먹어도 좋고, 언제나 먹고 싶은 그런 원픽은 없다. 엄마는 일찍이 말씀하셨다. 딱 하나, 항상 좋은 게 있어야 얻어먹지 너처럼 이것도 맛나고 저것도 맛있으면 얻어먹기 힘들다고. 그 말씀은 진짜 맞다. 엄마는 감을 따는 시기만 되면 여기저기서 감을 박스로 받으신다.
그런 나에게도 지치지 않고 매주 한 번은 즐기는 것이 있으니 바로 '술'이다. 술을 마셔보지 않았던 청소년 때 어렴풋이 예상은 했다. 유전자적으로 술에 있어서 나는 도 아니면 모일 것이라는 것을! 아빠는 술을 너무 사랑하면서 술이 꽤 센 자타공인 주당이신 반면, 엄마는 술을 분해하는 효소가 전혀 나오지 않는 듯하다. 아빠는 평생 마신 술의 양이 국제규격 수영장 하나는 채우지 않았을까 하는 농담도 하시고, 엄마는 평생 드신 알코올을 맥주로 환산해 소주병에 채워도 한 병이 안될 것이니 누구에게나 두 분의 차이를 직관적으로 가늠할 수 있도록 설명가능하다.
대학을 가기도 전에 수능을 101일(범생이만 모여있던 우리 반은 100일간은 진짜 공부를 하자며 101일 전에 맥주를 마시러 갔었다.) 남겨두고 마셔본 백일주로 엄마가 아닌 아빠의 피를 받은 것이 확인되었지만 인생의 쓴 맛을 몰랐는지 술이 맛이 없었다. 그래서 남들은 싱싱한 간을 믿고 부어라 마셔라 했던 20대엔 술 먹는 즐거움이나 재미를 모르고 지나왔다. 또 아빠가 자주 그리고 많이 술을 드시는걸 엄마가 싫어하시는데(사실 나도 좋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냥 기분 좋은 정도 드시는 게 아니라 과음인 날이 많았으니깐.) 굳이 나까지 거기 낄 필요는 없다고도 생각했다. 게다가 첫 직장도 여자들이 많은 곳이라 회식을 해도 맛난 음식에 맥주나 달달한 와인 한잔이 전부였다.
그랬던 내가 술의 맛을 알아버린 건 2007년 늦봄에서 초여름사이 전남친이자 현재 남편과 연애를 하던 때였다. 맥주 한두 잔은 마셨지만 그 이상 못 마시는 내가 '안타까웠다'던 그는 나를 명동의 중국대사관 근처 골목의 포장마차로 데리고 갔다. 비도 오는 날 포장마차는 소주를 배우기에 완벽한 장소였다. 기본안주인 칼칼한 홍합탕과 마늘과 청양고추를 넉넉히 넣고 센 불에 볶아낸, '닭모래주머니'라는 표준어로는 그 느낌이 살지 않는 '닭똥집'을 시켜놓고 시원한 소주를 마주했다. 보슬비가 포장마차 비닐지붕 위에 토독토독 떨어지고, 촉촉한 풀냄새가 배인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만난 지 서너 달 된 괜찮아 보이는 남자와 홍합탕, 닭똥집과 소주는 매우 조화로웠다. 둘이서 소주 두 병, 아마 내가 반 병 그가 한 병 반 정도를 마셨다. 기분 좋은 술기운이 오르면서 남자친구가 더 괜찮아 보이는 마법을 경험하고는 그 후로 나의 주량은 점차 늘어갔다.
그는 술을 즐기지만 딱 기분 좋을 만큼만 마시고 주사도 없고 필름이 끊기는 일도 없었기에 우리의 술자리는 그도 나도 또 다른 누군가가 끼어있어도 모두가 항상 즐거웠다. 평소에 하는 이야기도 하고 평소에 하기 힘든 이야기도 술기운을 빌어 털어놓기도 하면서 같이 웃고 울기도 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평일 5일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금요일이나 토요일 저녁에 맛난 안주에 술잔을 기울이는 즐거움은 그에게도 나에게도 예전에도 지금도 일상의 매우 큰 즐거움이자 행복이다.
시간이 지나며 술의 취향도 조금씩 변해갔다. 맥주 후 소주를 먹다가, 소맥 후 소주를 먹기도 했다. 독주는 너무 세서 힘들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느 날 아빠가 주신 싱글몰트 위스키를 먹고는 그 진한 알코올에 빠르게 기분 좋음에 도달하고 늘 차가웠던 몸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고는 위스키에 대한 편견을 걷어냈다. 와인도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다의 고정관념에서 못 벗어나다가 2년 전쯤 선물 받은 묵직한 레드와인을 마시고 와인의 매력을 지나칠 수 없었다. 와인은 분명 포도로만 만든 술인데 온갖 다른 과일이나 초콜릿, 버터의 향기까지 맡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남동생은 소믈리에가 울고 갈 만큼 와인에 대해 박식한 애호가라 추천도 받고 선물도 받아 마셔가며 그 많고 많은 와인들 중 우리의 취향을 찾아갔다. 바디감이 있고 드라이한 와인을 먹던 2년 전까지만 해도 화이트와인은 밍밍 시큼하단 느낌만 들 뿐이어서 레드와인만을 고집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선물 받은 맑은 피노누아의 깔끔함이 화이트와인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딱 1년 전 이맘때 남동생이 들고 와 펜션에서 바비큐를 하며 시원하게 마셨던 쇼비뇽블랑과 샤도네이의 매력에 흠뻑 빠져서 지난 1년간은 화이트와인만 계속 마셨다. 와인을 검색하거나 쇼핑하면서 한번 행복하고, 마시면서 또 한 번 행복하고, 맛있었을 땐 다음에 또 마셔야지 하면서 행복하고, 맛없어도 아직도 못 마셔본 와인이 세상에 넘치는 것이 행복했다.
물론 아직도 와인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항상 맛있는 와인만 골랐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내 입에 맞으면 남편의 입맛에도 좋았고, 그가 좋아하면 나도 좋았다. 우리는 둘이 나이 들어서도 술을 오래 마시기 위해 같이 운동을 시작하고 영양제를 챙겨 먹고 과음은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지금처럼 90세까지 술을 즐길 수 있도록 건강하게 사는 것이 요즘 우리의 목표다.) 술을 푸드에 끼워 넣는 것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나도 그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 중에 포기할 수 없는 것 1종을 고르라면 술이 아닐까? 술 못 마시는 우리 엄마와 우리 엄마와 비슷한 이유로 술을 매우 싫어하시는 우리 시어머니가 들으시면 기절하실지도 모르지만 우리 부부의 소울푸드는 술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어쩌면 술 그 자체보다 맛있는 음식과 술을 앞에 두고 같이 울고 같이 웃고 같이 고민하고 같이 기쁨을 나눴던 그 시간시간들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둘이 만나 셋이 되고 넷이 되면서 그 모든 시간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밀도 높게 나눌 수밖에 없었으니까. 결혼하고 16년 넘게 그와 지내면서 그가 나의 '소울메이트'인지에는 아직 확신이 없지만, 나의 확실한 '수울메이트'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