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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라도봄 Feb 07. 2024

인터넷이 없었지, 팬심이 없었겠니?

30년 전 엄마의 아날로그 덕질이야기

딸이 물었다.

"엄마 엄마! 엄마가 어릴 적에는 핸드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었다고 했잖아. 그러면 어떻게 할머니랑 연락하고 할아버지가 언제 집에 오는지 어떻게 물어봤어?"

"집에 올 때까지 서로 방법이 없었지.  아이들은 대부분 집 앞에서 놀고 있음 엄마들이 밥 먹으러 들어오라고 베란다에서 불러줬어. 그럼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가. 그렇게 저녁을 먹었고, 아빠들은 회사에서 출발할 때 전화를 집으로 해줄 때도 있지만 바쁘거나 사정이 있어서 못하면 그냥 마냥 기다리는 거지 뭐."

"아우 답답했겠다."

"지금 우린 핸드폰, 스마트폰이 다 있으니깐 답답하다고 느끼지 그땐 그런 걸 상상도 못 했으니 답답하거나 불편할 것도 없지."


헐... 근데 인터넷 없음 덕질은 어떻게 해? 아이돌이 뭐 하는지 어떻게 알고 팬클럽 가입도 못하지 않아?

음... 그때라도 시스템이 없었지 팬심이 없었겠니? 아, 그땐 팬클럽이란 말대신 오빠부대란 말이 있었어.

오빠부대라고?

응 오빠~~!!! 오빠아! 하고 무리 지어서 몰려다녀서 오빠부대였지.


엄마도 아이돌을 따라다닌 적 있어?

음, 아이돌이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엄마는 초등 6학년때 우리 별이 만할 즘 변진섭이라는 가수를 좋아했어. 그런데 오빠부대가 될 만큼의 열정은 아니었고 그냥 소소하게 사부작거리는 덕질이었지.


ㅋㅋ 엄마 체력이 안돼서 못 따라다닌 거 아냐? 오빠부대는 뭐 하며 몰려다녀?

아마 그 연예인 스케줄에 따라 방송국이나 공연에 쫓아다니는 거 아니었을까? 집을 알아내서 집 앞에서 기다리기도 한다고 했어. 엄마 친구 중에 신해철을 엄청 따라다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신해철이 등짝스매싱을 하며 "지지배야 여기 오지 말고 공부 좀 해!"라고 했데. 그 친구방에 가면 그때 입은 티셔츠를 벽에 높이 걸어놨어. 신해철 손길이 닿은 옷이라고.


그럼 엄마가 사부작 한 덕질은 모야? 포카 모았어?

하하하하하 그땐 포카는 없었어. 대신 책받침이 있었지. 아, 별이는 책받침이 뭔지 모르지? (책받침 설명 생략. 책받침이 왜 필요한지도 한참을 설명했으나 질 나쁜 종이를 써본 적 없는 아이는 이해가 힘들다.) 남학생들이 좋아해서 책받침으로 많이 팔린 여자배우들은 '책받침여신'이란 별명도 붙여줬어. 브로마이드를 방에 도배하는 친구도 있었고. 또 좋아하는 사진을 모아서 필통을 만들기도 했어.


필통을 만든다고?

응 하드보드지에 연필로 전개도를 그려서 필통모양을 만들고 그 겉면을 연예인사진을 붙여서 팬심을 가득 담은 나만의 굿즈를 만드는 거지. 엄마랑 같은 반엔 이걸 잘 만드는 장인같은 친구도 있었어.

출처 : 카페 분당판교 행복마을 -이런 스타일의 필통을 많은 친구들이 들고 다녔다.


그냥 굿즈를 사면 되잖아.

그땐 굿즈가 없었고 굿즈란 말도 없던 때야. 돈도 없고 시간만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도 책받침 사모으고 필통도 만들었어?

음 변진섭은 비주얼 가수는 아니어서 책받침을 모으거나 필통을 만들지는 않았어. 엄마는 책받침보다 기사를 보는 게 좋았어.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하는 지도 알 수 있고 이런 추억이 있구나, 이런 일을 겪었구나 그런 그 사람의 스토리를 알게 되는 게 좋았어. 또 기사옆에는 기자가 인터뷰하며 찍은 사진도 있거든. 그게 책받침의 사진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좋았지.


근데 인터넷이 없는데 인터뷰 기사는 뭘로 봐? 신문에 나와?

그땐 하이틴이라는 청소년 잡지나 티브이 방송순서와 연예인 기사가 담긴 TV저널 같은 잡지들이 있었어. 가끔 스포츠신문에도 연예인 기사가 나오니깐 그걸 사서 보기도 하고 그랬지. 근데 집에서 할머니가 구독하던 일간지 신문엔 연예인 기사를 찾기 힘들었어.

그리고 그걸 다 사면 너무 비싸잖아. 그러니깐 친구들이랑 나누기도 했어. 신해철 좋아하는 친구, 신승훈 좋아하는 친구, 이승환 좋아하는 친구 넷이서 각자가 산 신문이나 잡지에 다른 연예인 사진과 기사가 나오면 그걸 그 친구에게 주는 거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거지.


아! 그거 학교에서 배웠어. 품앗이! 품앗이 같은 걸 한 거네!

품앗이? 그러네. 품앗이 같은 거네. 서로의 최애를 나누는 건 정말 어마한 우정의 표현이었어. 왜냐하면 어떤 가수든 그 가수를 좋아하는 아이는 한 반에도 여러 명씩 있으니깐.


근데 유튜브 없으니깐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어디 나오는지도 모르고 다시 보기도 못했겠네.

그치! 재방송도 잘 없었으니 한번 지나간 가요톱텐은 다시는 볼 수 없었지. 별밤의 잼콘서트도 놓치면 다신 들을 수 없었고. 근데 그래도 연예인의 스케줄을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었어.

사서함이라는 게 있어서 어떤 번호로 전화를 걸면 자동응답기에 주별 그 연예인의 스케줄을 알려줘.

메모지와 샤프를 들고 전화해서 받아 적어 두는 거지. 당시로선 정말 획기적인 시스템이었어. 적어둔 스케줄을 보고 매일 아침 배달되는 신문에 티브이프로그램 편성표를 보고 형광펜으로 칠해가며 시간 맞춰서 보는 거지.


헉, 없는 게 그렇게 많았는데 샤프랑 형광펜은 그때도 있었어?

(갑자기 빵 터졌다.) 엄마라고 들고 공부했던 건 아니거든?


아이덕에 추억에 잠겼다.

지금처럼 아무 때나 무슨 노래든 들을 수 없던 시절. 

그래서 라디오에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는 날은 행운을 만난 듯 참 행복했다. 더블데크 플레이어를 끼고 좋아하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신나서 녹음하며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고 그걸 공테이프에 복사해서 테이프케이스에 예쁜 글씨로 목록을 적어 친구에게 선물하기도 했던 그때. 라디오 DJ의 멘트가 길어져 멘트가 전주와 겹치면 녹음하면서도 발동동 구르던 귀밑 3센티의 단발머리소녀들!


그러고 보니 내가 딸에게 재미난 옛날이야기를 해준 것이 아니라, 아이의 질문 덕에 30여 년 전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언젠가 친정엄마와 '엄마 어렸을 적엔'이란 전시를 기억이 났다. 전원일기나 시대극에서나 보던 모습들을 인형과 소품으로 재현해 낸 인형들을 보고 나의 감상은 '귀엽다. 옛날엔 이랬구나' 정도였을 테다. 그러나 엄마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었다. 엄마는 그 전시로 엄마 어릴 적을 여행하고 온 기분이었겠구나 싶었다.


"별아, 이번 설에는 할머니의 60년 전 덕질은 어땠는지 꼭 여쭤보고 오자. 분명 어릴 때 남진을 좋아하셨다고 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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