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
6월 탄생석 진주(Pearl)는 20년의 경력이 담긴 나의 이력서를 닮았다. 불순물에 수천 겹의 진주층이 쌓인 천연 진주는 성실히 살아온 나다.
97년 이후 23년 만에 이력서를 썼다. 23년 전과 달라진 것은 경력기술서다. 신입사원으로 지원하는 것과 임원으로 지원하는 차이다. 인터넷에서 이력서 양식을 다운 받아 이력서를 1차 작성한 뒤 아내에게 보여줬다. 아내는 애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저리주저리 쓴 느낌이란다. 23년 만의 이력서는 어렸웠다.
6월 말 직장 선배였던 헤드헌터에게 연락했다. 우선 이력서를 보내라 한다. 29일 오전 작성해놓은 이력서를 메일로 보냈다. 29일 오후에 답변이 왔다. 선배는 헤드헌터 회사들이 쓰는 양식이라며 몇 가지 팁을 주었다.
'이력서는 핵심역량과 경력 상세가 중요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자기소개서 내용은 삭제하고 고객사에 제출하는 때도 많습니다. 과거의 경력으로 미래의 포지션을 매칭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향후 매칭 하고 싶은 포지션과 매칭이 될 수 있는 경력 상세가 되어야 합니다. 업무 내용, 단어를 선택할 때 이전 직장에서 사용했던 표현은 모두 이해 가능한 단어로 바꿔 표현해야 합니다. 직책도 이전 직장식 직책은 바꿔야 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업무는 기술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의 23년 만의 첫 이력서는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밋밋하게 과거가 서술된 것에 불과했다. 받아 본 이력서 양식은 고민하게 만들었다. '핵심역량'이라는 항목에서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열심히 일했고, 인정을 받아서 임원이 되고 대표이사도 되었는데 나의 핵심역량은 뭐지?' 반나절을 붙들고 있어도 써지지 않았다.
가공하지 않고 자연에서 만들어진 그대로를 사용하는 진주 같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봐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같은 크기의 진주라도 더 동그랄수록 더 비싸지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더 동그랗게 만들어야 한다. 나를 드러내야 한다. 10만 3000여 종의 조개류 중 보석으로 사용되는 1,300여 종의 조개가 돼야 한다. 내가 천연 진주를 품은 조개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나의 밋밋한 이력서는 아내와 헤드헌터 선배의 조언에 따라 다시금 써 내려갔다. 처음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역량을 가졌는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수정된 이력서를 아내에게 보여 주었다. 이력서를 보던 아내는 '그동안 많은 것을 했네. 수고 많았어요'라고 말한다.
천연 진주는 불순물이 최소 0.5㎜ 이상 쌓여야만 보석으로 인정받는다. 0.51㎛의 진주층이 수천 겹이 쌓여야 보석으로 가치를 인정받는다. 나의 경력이 쌓여 진짜 실력이 되었을 때 나의 가치는 높아진다. 아무리 화려하게 이력서를 쓴들 진짜 실력이 없다면 볼 필요 없는 이력서가 된다.
6월의 탄생석 진주는 순결과 부귀를 의미한다. 순결과 부귀는 누군가가 만들어주지 않는다.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조개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수천 겹 쌓은 진주층처럼 나의 실력을 하나하나 만들어 가야 한다. 그리고 동그랗게 만들어 더 귀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 모든 게 내 책임이다.
이력서를 쓰는 동안, 나의 회사 생활 20년이 진주층처럼 차곡차곡 쌓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동그랗게 만들지는 못했다. 더 동그랗게 만들어 가는 것도 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