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속의 아기 태명을 뚜따로 지었다.
첫째 아기가 '뚜따!'라는 말을 잘 쓰기 때문에, 가족 모두가 잘 부를 수 있는 이름으로 지었다. ㅎㅎ
9주가 안된 뚜따와 함께 캐나다에 워킹홀리데이를 가려니...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산모가 되어본 적은 있지만, 예전의 기억과 실제 사이는 격차가 컸다.
첫 째로, 계속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꿈 속에서 빨리 달리려고 해도 물 안에서 뛰는 것 마냥 잘 뛰어지지 않는 그 답답함.
머리를 빨리 회전시키려고 해도 빨리 생각이 되지 않는 중압감.
아무리 자도 졸음이 계속 쏟아졌다. 하루에 18시간씩은 거뜬히 자대는 마당에, 임산부는 몇시간을 자야하는거지?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는 놀랐다. 보통은 일반인보다 1시간 가량만 더 잔다고 한다 (..)
둘 째로, 나는 나 자신'만' 믿어야했다.
남편이 첫째를 한국에서 돌보고, 나 혼자 해외에 가서 지낸다는 압박감이 꽤 컸다.
또, 워킹 홀리데이에 가서는 토플과 GRE공부를 해서 성적을 받고, 미국 대학원에 원서접수를 해야한다는 무게감이 있었다. 국비 유학생으로서 장학금을 받게 되었기에, 미국 학교에 입학해야 했고,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약속으로 받아낸 유학 비용이었다. 뱉어놓은 말이 많은 만큼 압박감도 컸다.) 미국 석사를 건너 뛰고 바로 박사 입장으로 가야했다. 나.. 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두려웠다.
외국에 나가면 오로지 나 혼자였다. 다른 가족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오롯한 나만의 시간이 있다는 것은 장점이 되기도 했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되기도 했다. 내가 쓰러지면 나를 돌봐줄 수 있는 다른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임신한 몸이 되어보니,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입덧 때문에 그냥 숨쉬는 것 만해도 힘들었다. 요즘에는 한식밖에 먹지 못하는데, 캐나다에 가면 음식때문에 얼른 돌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 해외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식단에 잘 적응을 하는 나였지만, 입덧 앞에서는 철저히 무너졌다.)
셋 째로, 비용적인 부분도 두려웠다.
다행히 캐나다는 공익적인 부분이 잘 갖춰진 나라였기에, 일한지 4개월이 되면 메디컬 케어가 무료였다. 하지만 그 전에 아기에게 기형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그 부분에 대한 비용은 내가 지불해야했다. 얼마나 청구될지 알 수 없었기에 두려움을 느꼈다. 추후 내가 캐나다에 잘 정착해서, 아기를 낳게 될 경우, 남편과 첫 째를 데리고 와야했다. 더 큰 집을 찾아야하지만 이것을 서포트 할 수 있을만큼 내가 돈을 벌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나는 꽤 대단한 도전 앞에 놓은 까만 점 같은 존재라고 느껴졌다. 사실 이를 피하고 싶다면 피할 수는 있지만, 삶에 다양한 선택지를 걷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내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