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모르는 단어가 쏟아졌다. 알고보니 누군가가 체포당하는 상황이었다. 식은땀이 죽 났다. 형사사건이었는데 나랑은 전혀 인연이 없었다. 사전을 뒤지며 통역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미안하지만 단어 뜻을 모르니 풀어서 설명해달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친절한 답변이 되돌아왔다. 내가 통역을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단어 뜻을 조정해줬다. 다음에 어려운 콜이 들어오면, '나는 이걸 할 능력이 되지 않아요.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법도 배웠다.
강력한 위기 상황이었고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던 경험이다. 다행히 용기를 내어 도움을 요청하니 좋은 반응이 돌아왔다. 위기를 극복하니 통역사로서 어떤 일이던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위기 상황은 짧았지만 메세지는 강력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이 참 맞다.
어느 날은, 산부인과에서 전화가 왔다. 뱃 속의 아기를 확인하는 참에 통역사가 필요해서 나와 연결된 것이다. 아기를 낳는다는 특성 상, 통역 대상자는 젊은 부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나이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 하지만, 혹시나 의료 단어가 나오면 어쩌지라는 마음에서 통역사를 요청한다. 그들의 입에서 처음 나온 단어부터 심상치 않았다. '유산 경험 1회, 다운 증후군 아기도 있었어서 선택적 유산 1회 더.' 그 이후로 이어지는 목 투명대 검사, 니프티 검사, 양수 검사, 정밀 기형하 초음파 검사, 유모막 검사.... 이날따라 유난히 오디오 상태도 좋지 않아 끙끙대며 통역을 이어갔다.
간이 초음파도 보고 하나 하나 관문을 통과하며 끝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니프티 검사를 하면 아기 성별이 나올텐데.. Gender reveal도 하시겠어요? 아니면 나중에 알고 싶나요?"
아무 생각 없이, 문자 그대로 아기 성별을 미리 알겠느냐고, 아니면 나중에 알고 싶냐고 통역을 했다. 그리고 3초 후,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젠더 리빌..?'
내가 캐나다에서 임신했을 때, 같이 살던 캐나다인 룸메이트가 '병원에 젠더리빌을 신청하라고!'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아기 성별을 편지에 적어 봉투에 숨겨주는 작은 이벤트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다니던 병원에서는 젠더리빌은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젠더리빌이라는 제도(?)는 희미해져갔다.
같은 단어를 듣는 계기로 번쩍 머릿속에서 기억이 난 '젠더 리빌'. 의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물었다.
"혹시.. 그 편지에 아기 성별 써서 주는 그...?"
"네 맞아요"
사실 통역업을 할 때에는 통역사가 부가적인 설명을 해주는 것은 안되지만 굉장히 애매한 상황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이 분도 '젠.더.리.빌' 단어 그대로만 놓고 보면 '성별을 알려주는거'라고 이해를 하기 때문이었다. "젠더리빌(명사) 하시겠어요?"라고 물으면 그녀의 귀에는 "젠더리빌(동사) 하시겠어요?"로 들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만 예외적으로 (평소에는 통역 규칙을 잘 지킨다. 글을 쓰다 보면 항상 예외 상황만 쓰게 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수도 있을 것 같다.) 간단하게 젠더리빌에 대해 설명해드렸다.
전화를 끊은 후, 어느 가족의 따뜻하고 애틋한, 특별한 추억이 될만한 거리를 지켰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