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본인이 속한 회사를 엄청 사랑하고 좋아하는 애사심 가득한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전 그정도로 만족하며 회사를 다니진 않았어요. 무언가 충족되지 않는 마음에 늘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며 살았거든요. 그런데 난임시술을 하면서 회사에 대한 애사심이 수직으로 상승했습니다.
자율출근제도를 이용해서 아침 일찍 병원 갔다가 출근하기도 하고, 시술하는 날은 휴가도 사용하며 제도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회사라는 걸 몸소 체험했거든요. 제도가 있지만 사용할 수 없는 회사도 있고, 제도가 아예 없는 회사도 있을텐데, 제가 속한 회사는 난임부부에게 친절한 회사라며 좋아했죠. 감사했어요.
하지만 남편 회사는 그렇지 않은 회사였습니다.
남자에게도 난임부부에게 친절한 회사가 필요하냐고요?
난임시술 중 남자는 딱 한번만 병원에 가면 됩니다. 바로 시술하는 당일 정자를 추출할 때, 그날 딱 하루요. 그것도 딱 오전에 잠깐. 그 짧지만 아주 소중한 시간. 난임시술을 하는 부부라면 그 시간에 남자는 무조건 시간을 내야만 합니다.
남자의 그 시간이 더 잘 쓰일 수 있도록, 더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여자는 최선의 노력을 합니다. 약도 먹고, 주사도 맞으며, 몸을 최적화시키는 노력을 하죠. 그런데 그 환경을 다 셋팅해놨는데 남자가 그 잠깐의 시간을 낼 수 없다면 노력은 다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남편 없이 인공수정...?
이번에는 인공수정 3차, 세번째 도전을 시작해요. 인공수정 3차 정도면 이제 머릿속에 인공수정 프로세스가 다 들어와 있습니다. 언제쯤 병원을 가고, 언제쯤 시술을 하겠구나 하는 그림이 그려지죠.
'남편, 아마 이번에는 25일쯤 시술할 것 같아. 26일은 의사선생님 휴무일이고, 24일은 좀 빠를 것도 같아서 24일 또는 25일로 알고 있으면 될 것 같아'
'그래?'
'응, 날짜 확정은 다음주 되어야 나오는 거 알지?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어요'
'응, 그런데 나 그주에 해외출장 갈 수도 있는데'
'아 그래?'
'확정은 아닌데 아마 안갈 것 같은데 혹시 몰라서'
'그래, 그래'
네... 인공수정을 해야만 하는 그 날에 남편의 해외출장이 확.정.되었습니다. 인공수정 예상일 전날에 출장간다는 남편에게 '어차피 전날 저녁에 비행기 타는건데 제발 몇시간만 미뤄서 다음날 아침 10시쯤 출발하면 안될까?' 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회사는 회사고, 개인일은 개인일이니.
그냥. 그냥. '어쩔수없지' 라고 말하며 뒤돌아 왔습니다.
이미 먹은 배란유도제와, 이미 맞은 과배란주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한번쯤 이런 생각 해보셨죠?
'과배란주사 이렇게 많이 맞다가 폐경이 일찍 오면 어떻게 하지. 여자의 몸에는 난자 총량제가 있다는데 미래의 내 난자를 현재로 끌어왔으니 내 난자의 수명은 더 짧아지겠네.'라는 생각이요.
아이가 언제 생기느냐, 한달이냐, 두달이냐, 그 시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언젠가 될 임신이고, 나는 계속 시도할텐데 한달 빠르냐 느리냐가 인생에 큰 영향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뭔가 제 몸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내 몸에 찾아올 정자가 없다는 사실이 그냥 조금 슬펐어요.
뭐가 중요할까?
회사에서 회사생활을 잘하는 것, 회사 일정에 맞추어 업무를 수행하는 것, 가정을 유지하려면 당연히 해야만하는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이라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가족을 셋으로 만드는 것, 우리가 아이를 갖기로한 것, 그것 또한 지금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죠. 회사에서 해외출장을 가는 건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정이고, 가정에서 인공수정 날짜를 한달 뒤로 미루는 건 내가 바꿀 수 있는 일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