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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데이 Sep 12. 2024

부부 관계는 숙제가 아니야

제도라는 틀에 갇히지 말자

인공수정 당일에 남편이 없을 수도 있지, 그럴 수 있지

인공수정 3차 시술시기에 맞춰 남편 해외출장이 잡히고, 잠깐 속상했어요. 이미 배란유도제 먹고, 과배란주사 다 맞았는데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니 조금 슬펐거든요. 그런데 남편이 저에게 늘 하던 말이 생각났어요. 남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늘 '그럴 수 있지. 괜찮아. 그냥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면 된다'는 말을 자주 하거든요. 왠지 저도 이번에 그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여보,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다음기회에 또 하면 되는 거지. 힘들게 괜히 출장 일정 바꾸려고 노력하지 말아요. 그냥 우리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자.'라고 말이죠.

남편을 따라서 그럴 수 있는 척을 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정말 그럴 수 있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속상한 마음보다는, '어? 그러면 예정 배란일에 시술을 못하지만, 예정 배란일 앞뒤로 우리가 관계를 가지면 되잖아? 오! 오랜만에 자연스럽게 해 보면 되겠어'라는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뭐 굳이 따지자면 당연히 배란일 앞뒤로 출장을 가서 정확한 날짜는 못 맞추겠지만요.


병원에 처음 왔던 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소위 말해 '숙제'라는 높은 확률로 임신이 될 수 있는 관계 날짜를 받아서 관계를 맺었고, 그 이후 인공수정을 하면서 정말 '인공'적인 관계만 맺었다는 사실이 생각났어요. 인공수정 시술 이후에도 평소대로 관계를 맺어도 되지만 그냥 뭔가 혹시나 이미 수정이 되고 있는데 방해가 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관계를 맺지 못했거든요. 진행하던 인공수정도 중단하는 게 아니라 잠시 한 달 뒤로 미루면 되는 거고, 가장 높은 확률인 배란일을 찾아 헤매는 게 아니라 그냥 예상 배란일 앞뒤로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으면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어요.

난임시술비 지원이라는 제도와 주사 맞고 약 먹으면서 배란일만 바라보던 저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한 틀 안에 갇혀있었는지 깨달아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이를 갖는 건 우리의 사랑이 베이스에 깔려있고
단지 과학의 도움을 살짝 받는 것뿐이다.
근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눈 맞는 그 순간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래도 기회는 내편이다.

'선생님, 저 예상 배란일이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일 것 같은데 남편이 그때 출장을 간데요'

'네? 정확히 언제요?'

'오늘이 금요일인데, 당장 일요일부터 목요일까지요'

'아, 대책을 세워야겠네요. 일단 난포가 양쪽에 하나씩 있고 크기도 아주 괜찮은 상태예요. 이걸 살리는 게 좋을 것 같고, 내일 시술을 하시죠'

'내일요? 내일해도 괜찮은 거예요?'

'네, 저도 아예 가능성 없는 거면 미루자고 말씀을 드렸을 텐데, 지금 크기나 상태가 괜찮은 것 같아요. 오늘 난포 성숙시켜 주는 주사 하나 맞고 가시고, 내일 가장 늦은 시간이 오후 2시 정도인데 그때 시술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정말요? 와, 감사합니다. 조금 속상했는데 살릴 수 있다니까 너무 기뻐요. 감사합니다.'


당연히 이번달은 기회가 없을 거라고 포기했는데, 예상과 다르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다니 정말 너무너무 기뻤어요. 출장 가는 남편한테 왜 그 회사는 이런 식으로 출장을 보내냐고 짜증 내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에 보상을 받는 느낌이었어요. 오늘을 시작으로 앞으로는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더 좋게 생각하기로 다짐했어요. 기회는 내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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