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소설가 김서령
소설가 김서령의 육아 에세이 <너는 나의 우주>가 매달 10일 일상건강 매거진에서 발행됩니다.
나는 손바닥만 한 마당이 딸린 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전엔 광화문의 오피스텔, 강남역의 오피스텔 등 무조건 교통이 편한 중심가를 골라 집을 고르고 친구들이 연락을 하면 언제든 쪼로록 뛰어나갈 수 있는 곳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 생각했다. 혼자 사는 비혼의 여자에겐 그런 것이 정말 중요했다. 그랬던 내가 서울을 벗어나 산골 마을 조용한 타운하우스에 자리를 잡고 마당에다 파도 심고 상추도 심었다. 양재 꽃시장에서 국화와 메리골드, 라벤더를 사 마당에 옮겨심기도 했다. 물론 그러지 않아도 어디선가 날아온 들꽃 씨앗들이 내 마당에 꽃을 무성히 피웠지만. 베란다에는 채반을 늘어놓고 우엉을 잘게 썰어 말렸다. 그걸로 차를 끓이면 소설을 쓰는 내내 집 안이 향기로웠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어울리지도 않게 왜 시골 아줌마 행세인 거야?”
친구들은 어이없어했다. 어이가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몰라. 그냥 당분간은 이렇게 살고 싶어서.”
혼잣몸이란 건 그렇게나 자유롭다. 무엇이든 내 취향대로 결정할 수 있었고 그 결정의 이유를 누군가에게 조잘조잘 보고할 필요도 없는 삶. 나는 그런 내 삶이 꽤 마음에 들었다.
2년째 연애 중인 남자 친구가 종종 놀러 왔고 소파에 길게 누워 그가 주말 낮잠을 자는 동안 나는 재단해 온 목재로 식탁을 만들거나 수납장을 만들었다. 아이보리색 천연페인트를 발랐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핑크색으로 새로 칠하기도 했다. 은퇴한 노부부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 타운하우스 단지는 늘 고요했다. 온도를 바짝 높인 고타쓰 안에 다리를 집어넣고 책을 읽거나 서재방에서 소설을 쓰며 그렇게 평생을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몹시도 평화로운 시절이었다.
그러니 그날 나는, 욕실에서 걸어 나와 바닥에 바로 주저앉을 만도 했다. 짝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내 손에는 임신테스트기가 쥐어져 있었다. 좀 더 낭만적인 말을 뱉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다행히 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이랬다.
“와…… 미친……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어떤 피임법이 가장 효율적일까, 묻는 나에게 친구는 피식 웃어보였다.
“야. 피임은 무슨. 우리 나이엔 자연임신 안 돼. 그러니 안심해.”
친구의 말에 나도 까르르 웃었더랬다. 하긴, 마흔두 살에 피임은 무슨.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모두 넋 나간 표정을 했다. 기가 막혀…… 미친 거 아냐? 우리 웃기려고 농담하는 거지? 남자 친구도 얼이 빠져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누가 뭐래도 가장 기가 막힌 건 나였다. 내가 아는 최고령 혼전임신의 주인공이 나라니. 살면서 이런 혼전임신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마흔두 살 동갑내기 남자 친구와 나는 그 누구보다도 단단한 비혼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돌이켜보면 신기할 만큼 우리의 결정은 신속했다.
“행복하니?”
“응, 행복해.”
거짓말이 아니었다.
“두렵니?”
“아니, 안 두려워.”
그것도 거짓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하나도 두렵지 않았고 우리에게 온 작은 요정이 무턱대고 귀여웠다. 자식들이 결혼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양쪽 부모님들은 어떤 신랑감이냐, 어떤 신붓감이냐 물어볼 새도 없었다. 배짱 좋은 우리는 서로를 부모님께 소개도 하기 전에 예식장부터 예약했고, 심심한 중년에 접어들어 별 할 일도 없었던 친구들은 이 우습기 짝이 없는 결혼식에 너도나도 몰려왔다. 덕분에 친구들 사진을 한 번에 다 담을 수 없어 세 번에 나눠 찍었다. 그날 나간 떡갈비 스테이크만 700 접시였다.
결혼식 때도 말짱하게 들키지 않았는데, 다음 날 떠난 신혼여행 비행기 안에서부터 거짓말처럼 배가 불러왔다. 웨딩드레스 속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아기가 기지개를 켠 것만 같았다. 나는 수영복은 물론이고 바다에 갈 때만 챙기곤 하던 예쁜 비치 원피스들을 하나도 입지 못했다. 급하게 호놀룰루의 아베크롬비에 들러 품이 넉넉한 티셔츠 몇 벌을 샀고 그러고도 불쑥불쑥 나오는 배에 깜짝 놀랐다.
“얘, 너 너무 성질이 급한 거 아니니?”
그것도 모자라 나는 하와이의 호텔 방에서 처음 태동을 느꼈다. 비누 거품이 퐁, 터지는 느낌이었다. 아아, 아기가 처음으로 나에게 건넨 인사였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나는 애벌레처럼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워 그 희한한 아기의 인사에 화답했다. 아기 아빠의 이름자를 따 태명은 ‘미니웅’이라 붙였다. 귀여울 것이 틀림없는 나의 미니웅, 반가워. 내가 너의 엄만데 말이야, 네 맘에 들었으면 좋겠어. 나는 그렇게 내 작은 요정과 동거를 시작했다.
<김서령 작가의 육아 에세이, 너는 나의 우주 2화는 일상건강 매거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