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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건강 Feb 15. 2022

내 진료실에 나도 모르는 병을 가진 환자가 들어온다면

by 배뚱뚱이

평소에는 기억할 수 없고 책과 논문을 찾아야
정확한 치료 용량을 결정할 수 있는 병


제가 병원에 있을 때 제 나름대로 내린 희귀질환의 정의입니다. 저는 이름도 생소한 ‘방사선 종양학과’ 의사였습니다. 1년에 우리나라에서 배출되는 의사가 약 3천 명 정도인데, 방사선종양학과 전문의는 보통 10~15명 정도 배출되니, 어찌 보면 의사 안에서도 0.5%짜리 희귀한 의사이긴 했습니다. 제가 전공한 과는 유방암, 폐암, 직장암, 전립선암 환자들을 가장 많이 진료합니다. 하지만 엄청나게 희귀한 질환들을 진료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 희귀질환 환자를 보면 의사도 긴장한다

희귀질환 진단을 받고 방사선 종양학과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운이 좋은 몇몇을 빼면 대부분은 병원들을 돌고 돌아 한참 고생을 한 뒤에야 온 사람들입니다. 희귀질환 환자들을 보면, 처음에는 몸의 어딘가 좋지 않아 동네 의원에 갑니다. 그런데 그 의원에서 주는 약이 전혀 듣지 않아 다른 의원을 갑니다. 여러 번 치료에도 증상이 나아지질 않자 큰 병원에 갑니다. 하지만 큰 병원에서도 이 병을 한 에 맞추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종합병원 2~3군데 다니다가 결국 제일 큰 병원에 가서 해당 질환의 권위자 교수님을 만나 겨우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합니다. 

진료하는 의사 입장에서는 희귀질환 환자를 처음 봤을 때 병에 대해 청산유수로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진단명을 알고 있더라도 ‘평소에는 기억할 수 없고 책과 논문을 찾아야 정확한 치료 용량을 결정할 수 있는 병’이기 때문에 진료가 끝나고 다른 시간에 별도로 공부를 하며 치료 준비를 해야 합니다. 게다가 이런 환자들은 이미 몇몇 병원에서 결과적으로 ‘오진’을 받고 많은 고생을 한 분들입니다. 의사의 말에 대한 의심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상태라 환자가 의사의 말을 믿도록 하기가 매운 어려운 상태인 경우가 많죠. 이미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고 의사가 무슨 얘기를 해도 믿지 못하는 상태인데, 진단받은 희귀질환이 생명을 위협한다고 하면 환자가 받는 정신적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다 보니 의사들도 희귀질환 진단받은 환자를 진료할 때 엄청 긴장을 합니다. (사실 희귀질환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분은 한 나라에서도 1~2명밖에 없거든요) 


# 왜 의사들은 한 번에 진단을 못할까?  

한 10여 년 전쯤, 미드 열풍이 있을 때 Dr. House를 매우 재미있게 봤습니다. 성격은 괴팍하지만 실력이 있는 의사로 나오는 Dr. House는 늘 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병이 아닌 굉장히 드문 확률의 병을 남들보다 먼저 찾아냅니다. (그런 의사이기를 바라고 오신 환자분에게 저 같은 배뚱뚱이 의사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의사 가운을 입고 병원에 가거나, 인턴으로 (의사 면허를 처음 따면 병원에서 과에 구분 없이 일하는 인턴과정을 1년 합니다) 일을 처음 시작할 때 많은 교수님들이 해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발굽 소리가 뒤에서 들릴 때, 말이라고 생각해야지
얼룩말을 먼저 생각하지 말라
(When you hear hoofbeats, think horses, not zebras)


미국의 유명한 의사인 테오도어 우드워드가 처음 했다고 알려진 명언입니다. 환자를 볼 때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흔한 질환을 먼저 의심하라는 내용입니다. 희귀병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흔한 병을 먼저 의심하라고 교육을 받다 보니 의사들은 닥터하우스처럼 희귀하고 이상한 병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렇게 흔한 병을 하나둘씩 지워 가다 보면 그제야 ‘혹시 흔히 볼 수 없는 희귀병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한참 나중에 스멀스멀 올라오게 됩니다. 이 기간이 환자에게는 깜깜한 터널을 지나는 기분일 것입니다. 의사들이 한 번에 병을 찾지 못하는 변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흔한 병을 먼저 의심하는 방법을 통해 대다수의 다른 환자들이 빠르게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의사들의 오진을 변명하는 것처럼 보여서 죄송합니다^^) 


# 희귀질환을 ‘발견’만 할 수 있을 때 의사는 가장 절망스럽죠

근위축성 측삭경화증(ALS: Amyotrophic Lateral Sclerosis)란 병명을 딱 접했을 때 이 병을 잘 알 수 있는 의사도 사실 많지 않습니다. 어렵다고요? 바로 이 병은 스티븐 호킹 박사가 앓았던 루게릭병입니다. 온몸의 근육이 점차 기능을 잃어가면서 서서히 사지 쇠약과 위축이 시작됩니다. 병이 진행되면서 호흡근의 마비가 오기 때문에 수년 내에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제약회사에 근무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병은 ‘cure’ 즉, 치료방법이 없는 병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의사 입장에서는 제발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병이죠. 의사로서 해줄 얘기가 없는, 그저 증상을 완화시켜주는 약물 치료 정도만을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저는 다행히 이런 희귀질환을 치료한 경험은 없지만, 더 이상의 치료 방법이 없는 말기 암환자들에게서 이러한 절망감을 비슷하게나마 체감한 적은 있습니다)

# 생각보다 많은 희귀질환의 첫 치료제들이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약회사에 와보니 생각보다 많은 회사에서 이 병을 목표로 한 약제 개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물론 개발하는 것과 실제 사람에게 쓸 수 있는 약으로 나오는 사이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는 약제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러한 희귀질환, 내지는 초희귀질환의 약제 개발이 국내 회사보다는 초거대 다국적 기업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제약업계에서 일하는 의사로 이러한 약제들을 조금이라도 빠르게 한국의 환자들에게 소개될 수 있도록 중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국내 연구진의 우수성을 해외 본사에 알리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에서 주요한 희귀병 연구 임상시험을 개설해 한 분의 환자라도 더 일찍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최소한 치료 시도라도 해볼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는 저 같이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의사들의 한결같은 바람일 것입니다.

제가 직접 치료했던 희귀질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질환은 색소성융모결절성활막염(PVNS: pigmented villonodular synovitis)입니다. 이 환자는 반복적인 무릎 통증으로 여러 병원을 전전했고, 다행히 같은 병원의 정형외과 선생님께서 진단을 빠르게 내주셨습니다. 반복적인 재발로 수술적 제거+재발방지를 위한 저선량방사선치료를 함께 한 케이스입니다. 처음 그 환자분이 오셨을 때 Pubmed (의사들이 주로 논문을 찾을 때 쓰는 사이트), 교과서, 구글을 뒤져가면서 조마조마하게 치료를 준비했던 기억이 납니다. 희귀한 질환인 만큼 몰라서 잘못 치료했다는 소리는 듣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진료실에 있지는 않지만 병원에 남아계신 많은 의료진들도 그때의 저랑 같은 마음일 겁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희귀질환을 보는 교수님들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수준 이상으로, 이미 세계적인 수준의 진료와 연구를 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몇몇 분야는 우리나라 선생님들이 세계적인 석학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하고요. 희귀질환이 ‘희귀해서 치료를 못 받는’ 병이 아닌 ‘단지 희귀하게 발병할 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이 되도록 계속 의료 기술과 과학은 발전할 것입니다.


매년 2월의 마지막 날은 세계 희귀질환의 날입니다. 4년에 한번 돌아오는 2월 29일의 희귀성에 착안했죠.

희귀질환 환우들이 질병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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