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한독의약박물관
1637년 병자호란에서 패한 조선.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1623년 ~ 1649년)는 청나라 태종에게 삼배고구두례(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숙여 세번 절하는 것을 세번 반복하는 항복 의식)를 하는 굴욕을 당합니다. 그리고 왕위 계승자였던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는 조선 역사에 있어 매우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죠. 비록 눈물을 머금고 항복은 했지만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반감은 커지기만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소현세자는 8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조선은 더 이상 소현 세자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독살로 의심되는 죽음을 맡게 됩니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일곱 구멍에서의 선혈, 검은 빛의 피부… 왠지 독살이 의심되지 않나요? 사실 독살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합니다. 또, 귀국길에 얻은 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설도 있죠. 하지만 독살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처음 끌려갔을 때만 해도 청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이 컸다고 합니다. 그런데 청나라에서 생활하며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됐고 새로운 문화와 기술에 눈을 뜨게 됐죠. 언제든 청나라에 복수를 하리라 이를 갈고 있던 인조와 대신들에게 이런 소현세자가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숭명반청(명을 받들고 청을 멀리한다) 사상을 따르던 조선의 대소신료들은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던 소현세자에게 조선의 왕위를 물려줄 수 없었다고 합니다.
# 조선시대 독약 판별은 ‘은’을 사용했죠
소현세자 죽음의 진실은 과연? 지금이라면 과학수사로 부검 등을 통해 소현세자 죽음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었겠죠. 대신 조선시대에는 ‘은’을 사용해 독살의 위험을 방지했다고 합니다.
은제약숟가락(銀製藥匙), 조선, 너비 3cm, 길이 28.3cm / 길이 30cm 은, 뇟쇠
은(銀)은 금속 가운데 열전도율이 가장 높아, 뜨거운 탕제를 떠서 옮기거나 떠먹는 데는 부적합한 소재입니다. 그럼에도 은이 약숟가락과 같은 의약기에 널리 사용되는 이유는 바로 독약에 쉽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은은 독약을 만나면 성질에 따라 그 색깔이 검은색이나 검푸른색으로 변합니다.
백자은구약주자(白磁銀具藥注子), 조선후기, 높이 28cm, 너비 23cm, 지름 17cm, 백자
백자주자는 왕실용 주자의 특색을 잘 보여주며 은(銀) 자물쇠를 부착했다는 희귀성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상단을 보면 은으로 만든 긴 막대가 주둥이를 덮고 뚜껑 아래 본체를 관통하여 뒤로 뻗어 있습니다. 이 막대 끝에 자물쇠를 채워 밖에서는 아무것도 넣을 수 없도록 제작했습니다.
이 외에도 독약과 극약을 관리하기 위한 상자를 만들어 별도로 관리를 했습니다.
독극약궤(毒劇藥櫃), 조선 18세기, 가로 43cm, 세로 23.5cm, 높이 24cm, 목제
약궤란 약재 수납을 위해 뚜껑이나 문짝이 달아 만든 직육면체형의 나무 상자를 가리킵니다. 이 약궤는 그리 크지 않은 편으로 독약을 별도로 보관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했습니다.
# 사약을 16사발이나 먹고도 멀쩡한 사람
독극약궤를 보면 ‘독약,(毒藥)’ ‘극약(劇藥),’ ‘극성약품(劇性藥品)’이라 쓰여 있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내용이죠. ‘독약’은 말 그대로 적은 양으로도 생명에 위협을 주는 약입니다. 반면에 ‘극약’은 적은 양으로 강한 작용을 나타내는 약으로, 표준 용량과 중독량의 차이가 적어 자칫 상용량을 지나치면 위험한 약을 말합니다. 또, ‘극성약품’은 극약보다는 약하나 인체에 해를 줄 수 있는 약을 말합니다.
그럼 과거 형벌에 사용되던 ‘사약’은 ‘독약’ 일까요? 시대극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사약’을 먹고 피를 토하며 죽는 죄인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사약의 ‘사’자를 ‘죽을 사(死)’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사약의 ‘사’는 ‘하사할 사(賜)’입니다. 사약은 신체 훼손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나름 명예로운 형벌로 왕이 하사하는 ‘극약’이었습니다. 사약에 들어가는 약재는 강한 독성을 지녔지만 적당량을 사용하면 오히려 약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을사전문록에는 조선 명종 때 임형수란 사람이 사약을 16사발이나 먹고도 멀쩡해 이후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