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한독의약박물관
1950년대 : 3남 2녀로 5명은 낳아야죠
1970년대 :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80년대 : 둘도 많다!
2000년대 : 자녀에게 가장 큰 선물은 동생입니다.
위와 같이 인구 표어는 시대별로 변화하였습니다. 2022년도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0.78명이라고 합니다. 이 만큼 현대사회에서 출산은 가정의 문제를 넘어 사회문제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요? 그리고 조선의 왕실에서는 어떤 의미였을지, 왕실 출산과 관련된 “태항아리”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왕조 국가에서 후손의 탄생은 나라의 기반을 다지고, 왕권 강화에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자손이 태어나는 것은 왕실의 경사를 넘어 나라의 경사로 여겨졌습니다. 조선 왕실에서는 자손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초제(醮祭)를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초제는 도교의 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로, 자손을 보기 위해서 『명종실록』에서는 영험한 산천(山川) 등에서 조용히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순종실록부록』에 따르면 묘향산 등에서 기원을 드렸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기자속(祈子俗) 즉, 아들 낳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으로 자손을 비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비단 왕실과 사대부 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두루 행해졌다고 합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문건(李文楗)이 저술한 『묵재일기(默齋日記)』 중 『양아록(養兒錄)』에 따르면 손자의 탄생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초제를 지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듯 왕실과 민간 모두에게 자손의 탄생은 중요한 일이었고, 이렇게 탄생한 자손의 태(胎)도 아주 귀하게 여겨졌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태항아리의 태(胎)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태(胎)는 출산 후에 배출되는 태반과 탯줄을 묶어 이르는 말입니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자와 공주가 태어나면 태를 태항아리에 담아서 태실에 묻어서 보관하였으며, 이 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남겼습니다. 왕실용 태항아리는 보통 내호(안에 들어가는 작은 항아리)와 외호(겉에 보관하는 큰 항아리)가 한 세트로 구성됩니다. 내호에는 태(胎)를 담고, 외호는 그 내호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태항아리를 태실(胎室)에 묻는 의식은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따라 명당(明堂)을 고르고, 좋은 날을 잡아 의식을 치렀는데, 이는 왕릉(王陵 왕의 무덤)을 만드는 것만큼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와 관련된 기록도 상세히 남아있습니다.
아래의 사진은 한독의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백자 태항아리 2점(내호, 외호)입니다.
내호는 아쉽게도 뚜껑이 남아있지 않으며 몸체 어깨 부분에 4개의 고리가 있어 뚜껑 손잡이 구멍과 실로 연결할 수 있는 구조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구연은 넓게 밖으로 말려 있으며 어깨 부분이 넓고 아래로 가파르게 내려가는 형태라 풍만한 느낌을 줍니다.
굽은 안으로 깎은 내굽으로 제작하여 안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
외호의 몸체는 길게 만들어졌으며 어깨 부분에 4개의 고리를 부착하여 뚜껑 손잡이 부분의 구멍과 붉은 실로 연결하여 고정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뚜껑 손잡이는 연꽃 봉우리 모양으로 아랫부분에 구멍이 사방으로 뚫려 있습니다. 구연부(입구)는 밖으로 말려 있으며, 어깨부터 아래쪽으로 서서히 내려가면서 좁아지는 형태로 단정한 느낌을 줍니다.
내호와 외호 모두 옅은 청백색을 띠는 백자 유약이 항아리 표면에 고르게 퍼져 있으며 은은한 광택이 돌아 태항아리의 매끈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태항아리 유물을 통해서, 요즘 못지않게 출산을 소중히 여겼던 조선시대 왕실의 문화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태 하나도 허투루 다루지 않고, 절차와 의례에 의하여 다루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조성한 태실은 즉위한 이후에 옮겨져서 다시 증설되었고, 풍수지리에 따라 태실의 위치가 정해졌기 때문에 태실 주변에는 그 영험한 기운을 받기 위해서 자손의 태를 담은 도자기를 묻는 일반인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출산후에 제대혈을 보관하기도 하고, 탯줄로 도장을 만드는 요즘의 풍속과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