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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건강 Mar 05. 2021

의약품 설명서, 꼭 읽어야 할까?

by 허당약사

우리 집 낡은 청소기가 드디어 힘겹게 빨아들인 먼지를 뱉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노후 청소기를 대비해 물망에 올려놓았던 새 물건을 장만했지요. 박스를 열자 본체는 안 보이고 꺼내도 꺼내도 끝없는 부품들만 가득했습니다. 뭐 이리 조각이 많나 매뉴얼을 볼까? 아니야 조립은 눈썰미지 설명이 무슨 필요! 허당약사 실력 발휘할 시간입니다. 퍼즐 맞추듯 완제품 사진을 봐가며 척척 조립을 완성했습니다. 위이잉~ 사용감도 좋고 흡입력도 짱짱하네요. 구청소기님은 고이 접어 구석으로.. 그동안 고생하셨네. 편히 쉬시게~ 

요즘은 휴대폰을 개통하든, 가전제품을 새로 사든 설명서 없이도 조립하고 사용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우선은 고객들이 스마트해졌고 제품도 갈수록 직관적인 기능과 디자인으로 출시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 해도 굵은 글씨로 강조한 주의사항 정도는 읽어보면 좋을 텐데 그게 쉽지 않아요.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설명서를 주섬주섬 챙겨보지만 이미 재생 용지로 환생한 지 오래 거나 잘 둔다고 모셔 두고는 못 찾습니다. 아쉬운 대로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아무것도 안 건드렸는데 고장 났어요”라는 뻔한 하소연을 해봅니다. 


맞아요. 가전제품이야 고장 나더라도 환상적인 AS로 다시 새 것처럼 쓸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의약품은 어떨까요? 제가 그동안 제약회사에서 고객 상담을 하며 경험한 안타까운 케이스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 약도 설명서 없이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제약기업에서는 약을 보다 안전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많은 연구를 합니다. 하지만 제형이나 포장에 한계가 있다 보니 사용(복용)에 꼭 필요한 내용을 사용설명서에 적어 제품 안에 동봉합니다. 환자 입장에서는 이게 참 꺼내서 펼치기도 귀찮고 게다가 내용은 얼마나 많은지 읽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경우가 생기곤 합니다. 


“예전에 훼스*을 사면서 약사님 설명 듣고 바로 상자를 버렸어요. 지금 먹으려는데 사용기한도 모르겠고 몇 알을 먹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케이스를 버리셨군요. 사용기한은 약상자에 인쇄되어 있고 용법과 주의사항은 설명서에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으니 다음부터는 버리지 말고 꼭 함께 보관해 주세요.)


“코가 막혀서 페*코스프레이를 샀는데 내가 봤을 때 구멍이 작아 보여 칼로 입구를 잘랐어요. 그랬더니 액이 콸콸 나와요. 바꿔줘요”

(원래 페*는 미세하게 분무되는 제품이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배출구가 아주 작습니다. 설명서를 보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안타깝습니다.)


“여름에 오베**질정을 받아서 다른 약이랑 같이 주방에 두었더니 다 녹아버렸어요.”

(오베**질정은 25도 이하에서 보관하셔야 해요. 여름철에 그 이상 온도가 높아지면 녹을 수 있답니다. 보관방법을 상자와 설명서에 모두 표시해 놓았는데 못 보셨나 봐요.) 

# 약을 오래 복용(사용)한 환자가 더 잘 안다? 

아무래도 장기간 약을 사용하다 보면 환자는 자연적으로 질환과 약에 대해서 잘 알게 됩니다. 그런데 잘 알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간혹 의사와 약사의 복약지도를 간과하는 경우도 있고 변경된 사항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래 경우처럼 말이죠. 


“내가 로푸**를 오래 쓰고 있어서 잘 아는데, 병만 꺼내 놓고 매일 소독하고 바르다 보니 알코올 솜이 모자라요. 좀 보내줘요” 

(로푸**는 사용 3개월 이후로는 1주일에 1회 바르는 것이 올바른 사용법이에요. 그리고 차광이 필요한 제품이라 제품 박스에 넣어 두고 보관해야 한답니다.) 


“여기저기 아파서 케*톱을 10년 넘게 매일 붙여요. 어제는 손목에 붙이고 땡볕에서 종일 일했더니 가렵고 벌겋게 되었어요.”

(케*톱은 붙이고 나서 2주 동안 자외선에 노출하지 않아야 해요. 긴팔이나 모자 등으로 자외선을 가려 주어야 한답니다. 빨리 병원 진료를 받으시도록 하셔요.) 


“당뇨약을 20년 넘게 먹고 있어서 내가 알아서 약을 조절해서 먹어요. 내 병은 내가 제일 잘 아니까요.” 

(병은 환자가 잘 아는 게 맞지만 약은 의사와 약사의 복약지도를 꼭 따라 주셔야 해요. 다음부터는 환자의 안전을 위해서 처방전대로 복용해 주세요.)

# 설명서가 없는 약은 정보를 알 수 없다? 


“약을 약포지에 조제받아 왔는데 설명서가 없어서 자세한 내용을 모르겠어요. 알 방법이 없나요?”

그럴 리가요. 의약품은 환자의 건강과 안전에 직결되는 제품이다 보니 용법과 주의사항과 같은 중요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처방받은 병원이나 약국에 문의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자분이 처방받은 약명. 성분, 복용법, 부작용 등을 모두 상담하실 수 있어요. 다음은 회사를 알고 계신다면 회사로 문의하실 수 있습니다. 어느 회사나 제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부서가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방법입니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는 검색창에 제품명을 치시면 제품에 대한 의약품정보사이트 또는 회사 홈페이지가 뜹니다. 클릭하시면 모든 허가사항을 확인하실 수 있어요. 참고할 수 있도록 식약처의 의약품안전나라 검색사이트와 약학정보원 링크를 공유해 드릴게요. 

어디선가 멜로디가 들립니다. 허당이 다가가니 작은 약병에서 “지금은 HD님이 **약 복용 할시간 ♪♩ 뚜껑을 열어주세요♬” 라는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허당은 무심히 약병을 잡고 뚜껑을 열어 봅니다. 매끈하게 디자인된 뚜껑이 열리자 2 정의 알약이 쏙 나옵니다. 약을 먹고 뚜껑을 닫습니다. 약병은 부르르 진동과 함께 지금 시각과 다음 복용 시각을 깜빡이며 “고마워요~ 오늘 점심으로 곤드레밥이 어떤가요? 그럼 6시간 후에 다시 만나요”라는 다정한 멘트를 남기고 조용해집니다. 사방이 고요합니다. 따스한 주말 햇살이 얼굴을 간지럽힙니다. 청소기를 돌리던 허당이 식곤증으로 잠시 약병과 대화하는 꿈을 꾸었네요. 모든 환자가 안전하게 약을 복용하는 그날이 빨리 오길 고대하며 남은 꿈을 마저 꾸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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