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있다면!
J의 기록
일상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꽤나 풀어낸 것 같은데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앉아 일에 대해 떠올려본다. 워케이션 내내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일을 했고, 아니, 애초에 나는 (질풍노도의 요소는 제외하고) 왜 선뜻 워케이션을 나설 수 있었던가. 답은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조금 오만하게 들리는 표현이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신뢰에 보답할 자신이.
내가 농담 삼아 우리 회사가 가장 잘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 나는 'HR 프로세스'라고 이야기한다. 어쩜 이리도 대단한 사람들을 채용하는 것인지, 그리고 감사하게도 우리 팀에 쏙쏙 데려와주는 것인지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을 정도다.
좋은 이들과 연속적으로 일해온 경험은 '회사 안의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내 일에 대해서는 가능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을 것. 항상 내 생각과 그 근거를 정리해 둘 것. 그렇게 1인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옆에 있는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을 작게나마 만들어 주는 것. 감사하게도 우리 팀은 1인분 그 이상을 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모두가 언제든 기꺼이 기댈 수 있도록 시간과 노력을 내어주는 이들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는 감각은 내가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도 달라지지 않을 요소였다. 사실, 나는 팀의 누군가 어디를 가서 일을 한다고 아무도 걱정되지 않았다. 필요한 순간에 빠르게 응답해줄 것이고, 논의가 필요하다면 바로 화상으로 대화할 수 있을 테니까. 오히려 가서도 일만 하느라 새로운 환경은 즐기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묘사가 너무나도 이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맞다. 우리 팀원들은 나에게 이상적인 사람들이다.
그랬기에 B도 나도, 팀원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회사 입장에서 내 행동을 리스크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B가 언급했던 것처럼 아직 워케이션 제도 도입 초반인 만큼 혹시 나 때문에 문제가 생길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나는 우리 팀 외에도 프로덕트와 연결된 많은 팀들과 협업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여러 번 발생하는 Zoom 미팅 중 우리 팀만 만나는 미팅은 30% 정도, 나머지 70%는 팀 외의 멤버들이 항상 참석했다.
똑같은 재택근무자라고 해도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을 공표하는 순간부터. 뒷배경을 Zoom 필터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만들더라도 다들 머릿속에 스치듯 생각하지 않을까? '저 사람, 제대로 일 하고 있나?' 하고 말이다. 당연하다. 일반적인 근무 형태를 벗어나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일을 하고 살아가는지 예상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조금 더 평소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며 근무 관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를 얻음과 동시에 셀프로 울타리를 친 모양새였다. B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우리는 워케이션에서 일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여러 번 대화를 나누었다. '일을 한다'에 대한 정의부터 워케이션에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체적인 의문,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점을 공유했다.
B와 나는 기본적으로 일을 하며 가까워진 사이였다. 다르게 표현하면 서로가 일하는 모습이 만족스러운 관계였다. 왜 우리는 만족감을 느꼈을까? 질문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 일을 한다는 건 뭘까? 어디서 어디까지가 내 책임일까? 우리는 워케이션에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까? 여러 질문과 답변의 끝에 우리가 정한 선은 이랬다.
'집에서 재택근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혹은 더 나은 컨디션으로 일을 하는 것'
재택과 워케이션은 다르다. 사람의 분위기도 환경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집에서는 예상할 수 없는 여러 가지의 리스크가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B가 언급한 것처럼 최대한 디테일하게 환경을 세팅했다.
Wifi에 대해서는 도착하기 전까지 안심하지 못했다. Zoom 회의에서 제대로 소통이 안되면 역시 워케이션은 변수가 많아 -라고 지적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 숙소 사장님에게 연락해 '근무를 해야 해서 wifi 속도가 중요한데'라고 설명하며 속도에 대해 확답을 받은 이후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짐을 풀자마자 zoom으로 회사 내에 다른 팀 친구와 연결해 대화한 이후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포터블 모니터의 화질은 썩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13인치의 작은 화면으로 일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목에 부담이 덜 가도록 높이를 올릴 수 있는 거치대를 설치하고, 노트북을 올렸다. 손목 건강을 위해 챙겨 온 버티컬 마우스와 마우스 패드도 꺼냈다. 손가락에 부담이 안 가는 가벼운 키감을 자랑하는 블루투스 겸용 키보드도 연결하고 손목 받침대를 놓았다. 늘어놓고 보니, 집에서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앉기만 하면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완성되었다.
구구절절한 묘사를 통해 예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일을 할 때 여러모로 도구를 따지는 편이다. 카페에서 분위기 있게 노트북으로 무언가 하는 일은 최대 2시간. 그 이상을 해본 적은 없다. 모니터를 보는 시선, 키보드의 편안함, 손목 각도 등등이 조금만 힘이 들면 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과할 만큼 장비를 챙겨 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좀 더 단출하게 일을 할 수 있는 몸과 정신력이 따라줬으면 좋겠지만 어쩌겠는가, 그냥 다 챙겨야지.
이렇게 준비하고 나면 일이 안 되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워케이션에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면 나처럼 유난스럽게 이것저것 챙겨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익숙한 업무 환경이 만들어지면 그 익숙한 수준으로는 일 하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