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
B의 기록
J와 내가 제주도로 워케이션을 떠났을 당시는 회사에서 타 지역에서의 재택근무를 허용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특정 기간 동안만 이 제도를 유지시키며 최적의 근무 제도를 찾아 나서는 중이었다. 물론 이러한 근무 형태가 개인의 업무 퀄리티를 낮추고 나아가 회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면 다시 연장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회사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구성원들이 최상의 업무 효율을 낼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주었고, 소속 팀의 리드는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든 맡은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제주도에서의 근무를 승인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 워케이션을 통해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었다. 혹여나 우리의 실수로 이 제도가 사라지는 상황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고 회사와 팀이 우리를 믿어준 만큼 우리도 팀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를 위해 가장 먼저 신경 썼던 부분은 업무 환경에 대한 부분이다. 사람마다 어떤 환경에서 일이 잘되는지에 대한 부분은 다르다. 책상의 넓이, 모니터의 크기, 의자 등 다양한 요소들에 대해서 나의 생산성을 해칠만한 부분이 무엇이 있는지 워케이션을 떠나기 전에 미리 파악하고 준비했다.
나의 경우 당시 진행하고 있던 업무 특성상 모니터의 크기가 중요했어서 제주도로 떠나기 전에 미리 16인치 맥북을 대여하였다. 또 J와 나는 책상을 넓게 쓰는 편이었어서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연락하여 혹시 여분의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해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았고 호스트의 배려로 우리는 넓은 테이블을 각각 하나씩 차지할 수 있었다.
2개의 테이블은 창밖을 볼 수 있는 방향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귤밭, 나무, 바다, 하늘. 제주의 육해공을 한 번에 다 볼 수 있는 아주 넓은 창을 가지고 있는 숙소의 엄청난 장점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가끔 귤밭에서 일을 하는 사장님과 눈이 마주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땐 멋쩍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연스럽고도 빠르게 블라인드를 내렸다.)
실제로 모니터에서 눈동자만 살짝 굴리면 초록색과 파란색의 자연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업무 스트레스 감소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나의 정신은 업무에 묶여있지만 나의 몸은 제주도에 존재하고 있음을 주기적으로 자각시킬 수 있었다. 자연으로부터 실시간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경험은 도시에서 일을 할 때는 쉽게 느낄 수 없던 부분이었고 이런 것이 바로 워케이션을 떠나야 하는 이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J는 숙소의 와이파이를 연결하자마자 1층과 다락방을 오가며 Zoom(화상회의를 위한 서비스) 연결이 잘 되는지 테스트를 했다. 다락방은 와이파이가 잘 되지 않으니 화상회의는 꼭 1층에서 해야 함을 미리 확인해주었다. 이어서 테이블에 각자가 챙겨 온 노트북 거치대, 멀티탭, 포터블 모니터, 노트 등을 꺼내어 자리를 잡아주니 여느 사무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 공간이 되었다. 여기서 일이 안되면 그건 그냥 일이 하기 싫은 거지 공간의 문제는 절대 아닐 것이다 싶었다.
숙소에서 일을 시작한 지 하루 이틀 지났을 때 오랜 시간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있느라 고통받은 엉덩이가 곡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루는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퇴근을 하고 당장 시내에 있는 다이소로 달려가 방석을 구매하여 엉덩이의 복지를 개선해주었다. 그리고 다음 워케이션을 떠날 때는 반드시 숙소 의자의 상태를 미리 확인하고 필요하다면 방석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숙소는 큰 창 외에도 시야가 탁 트인 테라스를 갖고 있었다. 업무 중 해결하기 까다로운 문제를 직면하면 잠시 테라스로 나가 제주의 풍경을 보면서 뇌를 식혔다. ‘그래. 어차피 자연 앞에 인간은 다 미물인데 뭐 어떻게든 해결하면 되지.’와 같은 생각 정리를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다시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
여기를 봐도 자연, 저기를 봐도 자연인 곳에 위치한 숙소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기숙 회사(?) 같기도 했다. 당장 문 열고 나갔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이 풀과 나무밖에 없다 보니 다 때려치우고 나가 놀고 싶다는 생각은 잘 안 들었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감소시킬 수 있는 평온한 상태가 유지되면서 업무에도 잘 집중할 수 있었다. (우리의 유일한 일탈은 30분 일찍 퇴근해서 시내에 있는 올리브영에 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올리브영을 속세라고 불렀다.)
익숙한 나의 공간이 아닌 다른 지역의 낯선 공간에서의 업무. 누군가 나에게 그런 환경에서 정말로 일이 잘 되냐고 물어본다면 당당하게 ‘당연하지. 너무 잘 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내 지인 중에서도 업무 환경이 바뀌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정해진 환경에서 일을 해야 업무 효율이 유지되어 워케이션에 대한 니즈가 전혀 없는 사람이 있다.
나도 아무데서나 집중을 잘하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도로 떠나기 전에 업무를 하는 데 있어서 나에게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 무엇이 있을지 미리 생각해보고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사소한 것까지 전부 적었다. 그중 대비가 가능한 부분들은 최대한 꼼꼼하게 준비해 갔고 부족한 부분은 숙소에 머물며 일을 하면서 상황에 맞게 조금씩 개선해나갔다.
이번 제주도 워케이션에서는 스트레스 관리에 효과적인 자연환경까지 더해져 집에서 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양의 업무를 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제주도에서 일했을 때의 업무에 대해 동료들과 팀 리더에게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일은 전혀 없었다.) 나의 업무 패턴을 고려한 환경설정과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가짐만 있다면 제주도가 아니라 지구 어디에서든 협업이 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