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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Ji Oct 02. 2022

내 예상과 상관없이 즐거웠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일상에 대한 첫 감상.


J의 기록


최근 즐겨 읽는 책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은 자아가 과하게 비대해질 때 괴로워지고, 가볍게 하면 할수록 마음이 편안하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이 세상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을 포기해야 마음이 편안하다는 이야기다. 말은 쉽지만 받아들이기엔 어려운 이야기다. 특히나 '컨트롤'하고 '관리'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겐 말이다.


하지만 그 말에 마음 깊이 공감하기에, 나는 내 삶을 돌이켜보며 자아가 가벼워졌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정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낸 더 즐겁고 행복했던 장면을 증거로 수집한다. 그 생생한 장면을 기억하며 '그래, 내가 어떻게 하지 않아도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겠지'라고 불안감을 습관처럼 끄집어내는 나를 설득한다.


제주 워케이션에서 내가 기대한 것은 숙소를 공유하고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무탈하게 지내는 것이었으나, 또다시 나에게는 선물이 주어졌다.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말이다.



1.B의 플레이리스트

서울로 돌아온 요즘은 약간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기상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부지런했던 제주 아침을 생각하면 자괴감이 느껴진다. 제주에서 나는 대부분 B보다 먼저 눈을 떴다.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와 1층으로 내려와 일기장과 책을 꺼냈다. 그리고 가끔 고개를 들어 넓은 창 밖에 펼쳐진 제주 풍경을 감상했다. 그다음 순서는 귀에 에어팟을 꼽고 노래를 듣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노래를 선택하지 않고 B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오늘은 B가 무슨 음악을 틀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B는 아침에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TV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내 기준으로) 긴 시간을 그 앞에 서서 음악을 골랐다. 급한 회의 일정이 없다면 대부분 그랬다. 나는 그 모습이 참 신기했다. 일을 할 때 보이던 모습이 일상에서도 보인다는 점에서 말이다.


조기 착수의 아이콘인 나는 아마 일단 플레이리스트 중에 눈에 걸리는 것을 일단 재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것으로 바꿨을 것이다. B의 접근 방식은 조금 달랐다. 아주 신중하게, 오늘의 날씨와 컨디션, 그리고 오늘의 일정, 요일, 여러 가지를 중얼거리면서 생각하다 튼다. (물론 가끔은 아, 모르겠다 하고 트는 경우도 있기도 했다.)


주로 많이 선택된 노래는 함께 본 오만과 편견 OST, B가 좋아하는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플레이리스트, 가끔은 랜덤 하게 유명한 스트리밍 유튜버의 플레이리스트를 선택하기도 했다.


누군가가 매일 선택하는 음악을 듣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잔잔한 기대감으로 내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채워줄 BGM을 기다리는 일은 생각보다 더, 더, 즐겁다. 게다가 그 선택 하나하나가 신선하고 마음에 들기까지 했으니. 나는 제주 워케이션이 끝날 때쯤 꽤 아쉬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가끔 제주 워케이션이 떠오르면 나는 B가 재생했던 플레이리스트를 유튜브에서 찾아본다. 그날의 평화로운 기분을 떠올리며, 신중하다 못해 심각한 B의 표정을 떠올리며.



2. 밥을 먹여야 하는 누군가가 내 밥을 먹여준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아니, 솔직히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오늘 점심과 저녁을 무엇을 먹을 것인지 생각했다. 가끔 어디선가 자취생들이 뭐 먹을지 생각하는 거 지긋지긋하다, 밥 하다가 하루가 다간다, 하는 말들이 체감이 되는 일상이었다. 특히 오전에 회의가 있는 월, 화 에는 정신 차리고 보면 점심이었고, 오후에 회의가 많은 수, 목에는 정신 차리고 보면 저녁이었다.


나는 자타공인 소식인이다. 의도한 건 아니고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제주에서 내가 어쩌면 소식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순 없으나, 워케이션 동안 나는 상당히 많이 먹을 수 있었다. 적어도 직접 한 요리에 한해서는 말이다.


나는 부모님과 살고 있지만, 활동 패턴이 달라 함께 식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재택 중에는 대부분 혼자 밥을 먹었고, 냉장고에 반찬이 가득해도 귀찮아서 잘 꺼내지 않아 나중에 혼이 나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제주에서는 나서서 반찬 가짓수를 추가했다. 찌개, 만두, 그러면 자연스럽게 계란말이 할까요?라는 말이 이어졌다. 풍성한 식단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잘 먹는 B를 보면 나도 모르게 식욕이 돋았다. 워케이션이 끝날 무렵 나는 계란말이와 군만두 굽기 장인이 되어있었다.


그런 느낌은 B도 마찬가지였는지 이와 관련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의 결론은 '누군가 밥을 먹여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움직인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옆에 누군가를 굶기지 않기 위해 나도 잘 챙겨 먹게 되어 버린다고나 할까. 이래서 사람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걸까? 우리는 어쩌다 보니 서로에게 밥을 먹여준 것이다. 웃음이 나왔다.



3. 똑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 좋아진다.

B와 나는 은근히(?) 취향 스펙트럼이 넓다. 싫어하는 것이 명확하지만, 일상에서 싫어하는 것을 발견할 일 자체를 잘 안 만들어서인지 대부분 좋아라는 반응을 서로에게 보여준다.


B와 24시간을 붙어지내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다고 해주는 사람이 함께하는 일상이 얼마나 즐거운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B는 제안하는 것을 거부하기보다 일단 해보고 판단하는 편이었다. 


제주 워케이션 초기, B는 명상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에도 일단 해보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고 싫다고 하는 경우와, 해보지 않고 싫다고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어느 쪽이든 존중받아야 하지만, 전자에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B는 내가 좋다고 하는 걸 일단 해보는 고마운 룸메이트였다.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B는 좋다고 강하게 표현을 하지 않지만, 호불호 반응이 확실하다. 그런 B가 같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나를 뿌듯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B가 다른 일정을 보내는 동안 혼자 다녀왔던 동백동산을 굳이 평일 점심에 다시 갔던 것도 내가 좋았던 것을 B에게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침한 시티걸의 얼굴로 B는 나 못지않게 자연을 좋아한다. 동산을 걷는 동안 B의 감탄사가 들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 발을 동동 굴렀다. 나 말고도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으면, 나는 그것이 더 좋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알차게 챙겨 먹었던 어느 날의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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