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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Ji Sep 20. 2022

진달래,라떼,해바라기

승마장의 말, 그리고 말.


J의 기록


여행으로 올 때는 몰랐으나 본격적으로 찾으려고 보니 제주가 얼마나 승마를 배우기 좋은 곳인지 알았다. 특히 우리가 머물렀던 선흘리와 같은 중산간지역이 특히 좋다. 이 부근에는 승마장에 여럿 있어 도로를 달리는 와중에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제주를 몇 번이나 오가면서도 승마를 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첫 번째로는 승마라는 운동에 관해서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말을 괴롭히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데이 클래스를 경험하고 난 후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승마라는 스포츠가 말을 괴롭히는 일이 전혀 아니라는 생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인간에 의해서 제한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동물권'이 보장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 세상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나이쯤은 되었다)


하지만 버거운 꽃마차를 끌게 하거나 무리하게 오랜 시간 서 있게 하는 행동과 비교하면 나은 점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살기 편하도록 갈아엎어져 버린 도시에서, 먹을 것을 자유롭게 찾아나갈 수 없는 이 나라에서, 말이 생존하는 하나의 방법 정도는 되겠구나 싶었다. 어떤 삶이든 말에게 만족스럽겠냐 싶지만 어쨌든 나의 짧은 감상은 그러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승마 선생님과 말이 교감하는 장면이었다. 인간의 언어를 쓸 수 없는 존재와의 교감은 강아지가 다였던 내 삶에서 커다랗고 압도적인 말과 교감하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말의 크게 뜬 눈이 강아지보다 훨씬 커서일까. 휘젓는 고개와 움직임이 하나하나 강하게 자기주장을 해서일까. 선생님은 멀리서도 말의 상태를 알아채고 나에게 소리쳤다.


"그때는 고삐를 당기고 확실하게 알려주세요!"


주춤거리느라 말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계속하면 말도 답답하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미안해, 미안해, 사과의 말이 튀어나왔다. 한 시간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레슨을 듣고 나니 욕심이 났다. 말의 기분을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대화를 해보고 싶어 졌다. 그 충동으로 나는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승마장을 찾아갔다.


오랜 시간 제주에서 승마장을 운영했고, 육지에서 내려온 경주마를 교육시키는 나름(?) 인정받는 곳이었다. 양옆에 뚫린 실내 마장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보면 멀리 야외 승마장에서 다른 선생님이 경주마를 교육시키는 모습이 보였다. 서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사장님이자 선생님은 투박한 말투를 사용하는 분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칭찬과 혼내는 말투가 도대체 구분이 가지 않았다. 지금 나를 칭찬하려고 소리치시는 건지, 잘못됐다고 지적 중인 건지 알아듣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기수가 반동을 제대로 못하면 말이 고생하는 거야!"


사장님은 수업 내내 엄격했다. 과연, 육지에서 일부러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만하다. (나만해도 항상 2-3명의 사람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제일 먼저 말이 싫어하는 것과 겁내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다. 그다음은 말이 아파하지 않는 털을 잡고 올라타는 법, 그리고 칭찬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그 승마장에서 '진달래', '해바라기', '라떼', 여러 말들을 돌려 탔는데, 매번 지금 말은 어떤 것을 잘하고, 어떤 성격이고, 왜 내가 그 말을 오늘 탔는지를 반복해서 알려주셨다. 말이 얼마나 똑똑한 동물인지 배웠다. 내가 조금만 만만하게 행동해도 말은 귀신같이 눈치를 채고 내 말을 무시했다.


어느 날 숙소 주변에서 산책을 하다가 골목 안쪽에 작은 마장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말 두어 마리가 고개를 빼놓고 갑자기 나타난 외지인인 나와 B를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우리가 멀리멀리 멀어질 때까지 시선을 고정하는 모습이 귀엽고 재밌었다. 그 얘기를 승마장 실장님에게 했더니 아마도 식용 말일 것이라고 했다. 말이 임신한 여자 몸에 특히 좋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10번의 수업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갈 때쯤, 사장님은 곧 외승도 할 수 있겠다며 짧게 칭찬을 해주셨다. 계속 이어갈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죄송하게도 허벅지가 저리도록 배웠던 승마자세는 빠르게 기억에서 흐려졌다.


아직도 남아있는 기억은 역시 말들과 함께한 순간이었다. 어설픈 내 자세에 고개를 털어내며 불만을 드러내던 도도한 진달래, 모처럼 리듬이 잘 맞아 힘차게 구보하던 해바라기의 뒷목을 바라보던 순간 같은 것 말이다. 언젠가 또 승마장에 방문하는 날, 말들이 건강하게 나를 무시해주길. 푸스스 소리를 내며 못마땅하게 눈동자를 굴려 내 쪽으로 바라보길 바란다.


마지막 날, 짧은 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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