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노트
마음이 휑하고 왠지 스산한 날이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어수선하다.
마음을 정돈할 겸 회사 주변을 느릿느릿 걸어 보았다.
이름하여 '느리게 걷기'.
상점 하나하나를 훑어보기도 하고
길 가는 사람의 표정과 행동을 살피기도 했다.
이 미용실에서는 아침에 펌을 하면 30%나 할인해 주는구나.
여기 콩국수도 파네.
담배를 입에 물고 뛰어가는 젊은이,
꼭 그렇게까지 피워야겠는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시동을 걸어놓은 채 잠을 자고 있는 아저씨.
모든 풍경이 정겹게 와닿는다.
느리게 걸을 때에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삶의 모습들.
피식피식 웃음이 나고 살포시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스산했던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것만 같았다.
내 원래 취미는 ‘하늘 쳐다보기’이다.
지금보다는 젊었던 시절, 이력서를 작성할 일이 있을 때
취미를 적는 칸에 ‘하늘 쳐다보기’라고 적은 적도 있다.
25년 전, 버거운 마음의 짐이 나를 뒤덮었던 어느 날.
타고 있던 지하철이 지상으로 빠져나오던 순간이었다.
출입문 옆에 서 있던 나는,
미세먼지로 뒤 덮인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청명한 하늘을 마주하게 되었다.
푸르른 하늘이 어디 그 날 뿐이었겠냐 만은,
광활한 하늘을 본 순간 무겁게 짓눌렸던 마음이
순식간에 회복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피를 전부 말려버릴 것만 같았던 근심도
잔잔했던 마음의 호수를 휘저어 놓았던 불안도
온데간데없었다.
상황은 달라진 게 없는데 하늘이 내 마음속에 들어온 순간
한 순간에 마음이 고요해진 특별한 경험,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영롱하다.
어른으로, 아빠로 성장통을 겪고 있는 지금도
불안과 근심은 언제나 내 안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가
불현듯 엄습할 때가 있다.
모든 것은 결국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이라는 녀석과 잘 대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체가 없는 허상에 짓눌릴 필요는 없다.
마음이 어수선하고 무거운 날이었는데
느리게 걸으면서 이런저런 삶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 짓다 보니
한결 가뿐해지고 정돈된 느낌이다.
오늘 내 인생에 ‘느리게 걷기’라는 취미를 추가한다.
앞으로도 종종 하늘을 쳐다보며 느릿느릿 걸으면서
내 마음과 얘기 좀 나눠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