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많은 할머니가 되고 싶어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그 시간들을 글로 남겨보면 좋을 것 같아."
태어난 지 22번째 되는 날이자, 처음으로 해외에서 맞는 생일이었다, 애런은 촘촘히 줄이 그어져 있는 손바닥만한 빨간색 일기장을 건넸다. 그녀는 따뜻한 성품을 지닌 30대의 여성으로 땅콩처럼 작고 통통 튀는 사내 아이의 엄마다. 미국 교환학생 시절, 생애 처음으로 외국 땅을 밟은 나에게 아늑한 방을 내주고, 집 구하는 것을 도와주며, 낯선 나라에서 적응하는게 무서워서 끙끙대던 나를 위해 기도를 해준 친구이기도 했다
그렇게 글쓰기를 시작했다. 여러 감정들로 마음이 찰랑거릴 때면 텅빈 노트를 펼치고 무엇이든 써 내려갔다. 가득찬 물컵이 물 한방울에 넘치듯, 방황하고 불안해하는 날들이면 일기장에 이뤄지지 않은 걱정들과 두려움들을 쏟아냈다. '점심에 먹은 떡볶이가 맛있었다' 같은 초등학생 일기 수준의 기록부터, 남몰래 좋아하던 친구를 향해 썼던 편지도 있었다. 분에 넘치게 행복한 날이면 졸음이 쏟아져도 불을 끄지 않고 꾹꾹 눌러 적었다. 이미지는 아이폰의 고화질 카메라로 완벽히 기록 되지만, 그 날의 공기와 우리가 나눈 눈빛은 글에서만 살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빈 종이와 빈 화면을 맘껏 누릴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내 머릿속은 지금보다 훨씬 엉망이었을테고, 하소연으로 밤늦게 친구들을 괴롭히는 밤들이 더 많았겠지. 미숙하고 생각 많은 나에게 글쓰기는 대나무 숲이 되어줬고, 내 인생의 순간들에 느낌표를 찍게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검은 활자 속에서 나는 꾸밈없는 내가 될 수 있었다.
타지에서 회사원으로 홀로 지내면서, 점점 다양한 가면을 쓰게 된다. 나는 아침 인사를 하는데 남들보다 많은 에너지를 쓸 정도로 내성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회의에서 의견을 낼 때면,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커리어 우먼인 척을 한다 (사람들 눈엔 바들바들 떨면서 얘기하는게 뻔히 보이겠지만). 의례적인 이야기와 농담으로 재미없는 회식 자리에서는 볼 근육이 떨리게 웃고, 공감하는 척 고개를 주억거린다. 집에 가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을 숨기려고 알코올의 힘을 빌려 마음에도 없는 흥을 낸다. 반응이 차가운 고객에도 주눅들지 않고, 없는 자신감을 끌어모아 우리 회사의 서비스를 들이 민다. 그렇게 자꾸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 내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겹겹이 가면을 쓴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한 보호막이지만, 나는 점점 내가 낯설다. 하지만 활자와 문장들 속에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될 수 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원형의 마음으로 솔직할 수 있고, 내 마음이 정말 원하는 삶을 생각하게 하고, 그를 위해 용기내게 한다.
언젠가 지금껏 살아온 삶의 두 세배를 사는 시간이 오겠지. 하얗게 머리가 센 할머니가 되면, 매일매일이 비슷해서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 될 지도 몰라. 그 때의 나는 추억 보따리가 통통한 할머니이기를 소망한다. 비오는 날 커피를 끓이고 오후에 가만히 넋을 놓고 있을 때. 매일 다른 순간들이 떠올랐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의 방황과 불안이 그때에는 흥미 진진하게 곱씹어볼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지금 이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싶어서 계속 글로 써두고 싶다.
글쓰기에서 가장 막막한 지점은 스스로의 슬픔과 기쁨과 안위로 가득 차서 다른 존재가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이다 내면까지 뼛속까지 깊이 잠수하는 단계를 마치고 나면, 그 시선을 다른 사람에게, 세계에게 확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시선이 타인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그 글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나는 매일 쓸 것이다. 몇 백편, 몇 천편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조금은 달라질 내 글을 고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