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다운이 끝나고
싱가포르에 오기 전, 나는 방 두 칸짜리 작은 집에서 부모님과 살았다. 밥 먹었니, 몇 시에 집에 들어오니, 지금 뭐하니, 방문을 두드리고 내 얼굴을 확인하는 부모님의 사랑은 감사했지만, 사실은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부모님의 통제나 보호 없이 독립된 성인으로써 오롯이 살아보고 싶었다. 세상과 분리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에서, 낮 동안 회사에서 어질러진 마음을 정리하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 내가 그리는 삶에 더 가까워질 것 같았으니까.
그러다 작년 가을, 싱가포르로 터전을 옮겼다. 처음으로 혼자 살면서 방이 이렇게 조용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사실 외롭긴 해도 자유롭고, 일과 후에 삶을 즐길 수 있는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그러다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으로 싱가포르가 락다운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는 것이 금지되는 강력한 이동 제한 조치)이 되고 말았다. 첫 달만 해도 요가를 시작하고, 매일 가족과 친구들과 통화하며 잘 버티는 듯 했다. 그런데 두달 째로 접어들자 이 사태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불안했다. 고요한 방에서 하루 종일을 보내고 있노라면, 가끔 그 조용함이 사람을 미쳐버리게 했다. 방 한칸에서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고 채팅과 전화로 사람을 만나지 않고 일을 하다보니 매일은 똑같이 흘렀다. 무엇보다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누구도 확답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견디기가 더 힘에 부쳤다.
어느 날은 샤워실에서 목욕을 끝내고 문을 미는데, ‘혹시라도 내가 여기에 갇히면 누가 날 구해주지?’라는 두려움이 불쑥 올라왔다. 나는 매일 직장에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자주 만나는 친구나 애인 혹은 이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제서야 내가 뿌리 없는 나무 같았다. 드디어 꿈꿨던 자유로운 싱글의 삶을 살게 되었지만, 한국에서 누렸던 안정감은 더 이상 없었다.
2달 반에 걸친 락다운이 드디어 끝나고 해방이 찾아온 날이었다. 서킷브레이커가 끝난 첫번 째 금요일, 사람들이 벌떼처럼 거리로 몰려나왔다. 살갖이 드러나는 파티용 드레스와 10cm 는 족히 넘을 듯한 구두를 신은 여자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사람들을 헤치며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당분간 도심은 피해야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페달을 밟았다. 사실 이동 제한이 풀려도 헛헛한 마음은 크게 변함이 없었다.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은 다섯 손가락에 꼽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러 이벤트에 가는 건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거리를 차지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렇게 또 다시 길을 잃은 기분에 빠질 무렵, 문득 지금 내가 가야할 곳이 떠올랐다. 바로 댄스 스튜디오. 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곳. 연습실로 돌아가야겠다고 말이다.
락다운이 시작된 이후로 모든 댄스 학원들이 문을 닫았다. 그래서 방에서 의자 등 온갖 짐들을 치우고 유투브의 동영상을 찾아가며 혼자 춤을 연습하곤 했다. 우리 집 옥상 한 켠에서 러닝을 하는 사람들을 피해 한쪽에 숨어서 말이다. 그런데 몇 주 뿐, 코로나로 우울해진 마음에 춤을 연습할 의욕은 바닥이 나 버렸다. 다행스럽게도 2달 반 만에 드디어 스튜디오가 다시 열렸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스튜디오에 미세하게 쿵쿵, 진동이 울렸다.
현대 무용 기초 수업 시간, 오늘 우리는 몸으로 바닥을 쓸고 안전하게 착지하는 동작을 연습했다. 바닥으로 착지할 때 다치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바닥에 스며드는 연습이었다. 나는 작년부터 춤을 추기 시작했기 때문에 동작을 보고 습득하는 속도가 느리고 어설프게 겨우 흉내만 낸다. 그래서 수업이 시작하고 10분 정도가 흐르면, 언제 1시간을 다 채울 수 있을까 막막하다. 선생님의 물흐르듯 빠른 회전을 보며, 나 저거 못할 것 같은데 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 겁을 먹어 버린다. 그렇지만 혼자서 댄서들의 유투브 영상을 보고 따라할 때와는 달리, 스튜디오에 있으면 어떤 에너지가 나를 그냥 하게 만든다. 저 동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쉼호흡을 한 번 한뒤, 복부에 힘을 주고, 한쪽 발 끝에 중심을 잡는다. 반대쪽 다리로 지면을 박차고 무릎 옆에 살짝 포갠 뒤, 몸의 중앙을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한다. 마음은 한 바퀴를 가뿐히 돌지만, 현실은 반 바퀴쯤에서 삐걱대다가 멈추고 만다. 그럼에도 쉼 없이 움직인다. 그렇게 생각은 느려지고, 근육의 반응은 빨라지고, 등은 땀으로 축축해진다.
선생님은 수업은 끝났지만 질문을 한가득 품은 우리를 데리고 건물 앞의 공터로 향한다. 아까 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동작이 중간에 왜 멈추는지를 얘기하다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아스팔트 한쪽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팔을 좀 더 바닥에 가깝게 구부려봐. 한층 부드럽게 성공했다. 훨씬 낫다! 며 박수를 쳐준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이 끝나고도 40여분을 내가 자주 틀리는 동작을 꼼꼼히 짚어주며 이런 저런 피드백을 준다. 그녀는 우리의 질문이 끝날 때까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집에 가는 길에 내 마음은 꽉 차오른 기분이었다.
나와 함께하는 동료들, 그리고 내 동작을 지켜봐 주는 선생님. 그래서 스튜디오에서는 겁이 나더라도 그냥 발 끝을 움직일 수 있다. 수업이 끝나고 스튜디오를 빠져나올 때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사실 내가 동작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든 말든, 사실 아무도 눈여겨봐주지 않는다. 그런데 플로어에 서면 늘 학생의 기분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실패해도 괜찮고, 못해도 내가 더 나아지게 도와 줄 선생님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설레는 일인지. 락다운 동안 할 수 있는게 없다보니 결국 일에 매몰되곤 했는데, 내가 하나의 부품처럼 느껴지곤 했다. 내가 일이고, 일이 나인상태. 실제로 일이 아니었다면 이 나라에 오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내 삶에서 회사에서의 성취와 인정의 무게가 점점 커졌다. 그러던 차에 연습실에 오니 머리가 맑아지고 생기가 돌았다.
일상을 지탱하는 건 이런 느슨한 연대가 아닐까. 매번 서로의 이름을 까먹곤 하지만, 딱히 못해도 생계에 영향을 주지 않지만 내가 사랑하는 것을 함께 해나갈 동료들이 여기에 있다. 낯선 이방인의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