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결혼 이야기를 보고
몇년 전 '블루 재스민'을 보고 몇일 내내 우울감에 시달렸다. 맥주를 몇 캔이나 비우면서 봤던 그 영화에서 나 자신을 재스민에 끊임없이 투영시켰고 재스민이 미쳐가는 것을 보면서 괜히 나도 미쳐가는 것 같았다. 그 이후부터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감정적으로 연약해져있다고 느껴질 때는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만한 영화를 보지 않았다.
결혼 이야기는 두 가지 이유에서 보고 싶지 않은 영화였다.
첫번째로 '결혼'이라는 주제 자체를 내 시간 속에 넣는다는게 부담스러웠다.
나는 '결혼'에 대해서 굉장히 모순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나 결혼이 하고 싶어!'라고 말하면 지금부터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마치 '결혼'을 위해서 만나는 사람인것처럼 치부될 것 같았다. 결혼을 위해서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인연을 위한 순수한 마음이 마치 결혼이라는 제도를 위해서 퇴색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몇 살이 되었든 내가 나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싶고 혼자서도 잘 사는 나인데 '결혼이 하고싶다'고 말하면 괜히 타인의 시선에 굴복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타인에게 증명하기 위한 삶을 살았을까?)
사적인 이유지만 일전에 만났던 연인이 비혼주의자였고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나 역시 비혼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아마 마음은 결혼을 원했겠지만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비혼을 선택했을 것이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익숙해져버렸다.
두번째는 몇몇 트레일러로 본 두 주인공의 싸우는 모습이 너무 잔인했다. 물리적으로 잔인한 것만 못 보는 줄 알았는데 감정적으로 잔인한 것 역시 나에게는 어려웠다. 자극의 역치가 굉장히 낮다는 말을 간혹 들었는데 트레일러만 봐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고 정말 말도 안되게 유치한 말들로 마음을 손으로 꽉 움켜쥐어서 발 아래까지 끌어내리고 뜯어내버리는 그런 장면들이 나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야기를 본 건 이 모든 걱정을 호기심이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오스카 시상식 때 여우주연상 후보에서 본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가 궁금했다. 2019년 최고의 영화 엔드게임에서 나에게 가장 큰 감동을 준 사람이 블랙 위도우였고 내가 본 영화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대부분 블랙 위도우였으니까. 블랙 위도우가 아닌 그녀가 궁금했다.
영화의 내용을 한 줄로 설명하면 '이혼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어떤 다른 말로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이혼이 시작되고 소송을 진행하며 마무리가 되는 그 시간들을 영화에서는 다루고 있다. 극의 초반부에는 두 사람, 찰리와 니콜이 서로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한 가족을 이루면서 어떠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지만 영화의 90%는 갈등이다. 풀리지 않을 것처럼 지독하게 할퀴고 상처를 내고 괴로워하지만 결국은 모든 갈등이 해소된다. 결국 모든 일은 끝이 나게 되어있나보다.
몇몇 이혼을 겪은 지인들이 있지만 아무리 가까운 지인일지라도 그 속에 숨겨진 사연은 묻지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연인이 헤어져도 이렇게 아픈데 하물며 부부는, 가족을 망가뜨리면서까지 갈라지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할지 감히 내가 위로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할 수 있도록 가만히 앉아 귀를 열어주는 수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더라.
그래서일까 니콜이 이혼을 결심하고 이혼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이 낯설어서 신기했다. 저렇게 물고 뜯어버리는게 이혼 소송이구나. 소송을 한 번 진행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승률 100%로 예측되는 소송이라도 그 과정이 지긋지긋하고 서로에게 어마어마한 상처를 남긴다고 들었는데 그게 정말 사실이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좋지 않게 포장하는 것들. 악질적으로 포장한 말들을 서로의 앞에서 하나하나 읊어주는데 분명 모니터 밖으로 보고 있는데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어졌다.
신기하게도 이 영화를 보면서 딱 두 장면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엔드게임에서 호크아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운 사람치고 이 영화에서는 거의 울지 않은게 참 신기했다.) 첫번째는 바로 첫 장면. 함께 일하는 니콜과 찰리가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니콜은 그녀의 감정을 숨기고 찰리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덤덤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찰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벽 뒤로 걸어들어오며 그녀는 눈물을 흘린다.
이성간의 사랑에서 나는 두 가지의 사랑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내가 나로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사랑, 다른 하나는 내가 나를 잃어가면서 지켜가는 사랑이다. 두 가지를 놓고 보자면 후자의 사랑이 더욱 매력적이고 치명적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로서 온전히 존재하면서 열렬히 사랑까지 할 수 있는건 대단히 축복같은 일이다. 두 개의 저울에 올린 각각의 사랑의 무게에 그 누구도 아쉬움이 없는 관계.
이제는 더이상 사랑과 인연에 환상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는 그런 사랑에 환상을 가지고 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타인을 그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하는 것. 타인을 너무 많이 사랑하게 되면 어느 순간 중심을 잃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양보하며 마치 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인 것처럼 동일시하게 되고 결국 사랑이 너무 깊어 나는 이미 그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다.
니콜도 그랬을 것 같았다. 그녀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해왔는지 알 길이 없지만 그럼에도 사랑이라는 이유로 타인을 위한 희생과 헌신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그렇게 결혼 생활을 유지해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선에 와버렸고 그녀는 이혼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을 것이다. 희생과 헌신은 분명 숭고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 희생과 헌신이 스스로를 파괴하기 시작한다면 과연 그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일까.
두번째로 눈물이 글썽거린 장면은 바로 마지막 장면. 이 장면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설명과 감상은 생략.
영화를 보고 내가 한 생각은 저런 놈 안 만나야지.....가 아니라 니콜처럼 하지 말아야지 였다. 누구의 잘못이고 누구의 잘못이 아니고가 아니라 한 쪽이 계속해서 희생하는 것은 두 사람을 위해서도 결코 좋지 않다고 느껴졌다. 나 역시 갈등과 마찰을 싫어하다보니 계속해서 희생하고 싶어했던 적이 있었다. 나에게는 큰 일이 아니니 내가 조금 양보해서 사랑하는 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얼마나 멋진 선택인가! 이런 마음에 스스로 대단하다며 자아도취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니콜을 봐도 (나를 봐도) 관계를 오래 유지하려면 작은 갈등이라도 함께 해결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맞추어가면서 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상대의 이야기가, 상대가 만든 작품이 아무리 매력적이라고 해도 내가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에 의문을 제기하고 줄을 긋고 새로 이야기를 써내려 가지 않는 이상 그것은 여전히 상대의 혼자만의 이야기다. 나는 그저 열렬한 독자일 것이고 그 삶에 내 색을 입힌 이야기들을 넣을 수 있는 것들은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 작품을 만드는 상대는 상대의 나름대로의 방식에 더욱 익숙해질 것이고 나 역시 익숙해져 그 흐름을 깨는 것이 두려울테니까.
LA의 니콜, 뉴욕의 찰리. 거주하는 도시의 특성으로도 극명하게 나뉘는 두 사람이 그 긴 결혼 생활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그 방법이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바보같이 미련하고 어리석었을지라도 그래도 그들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시간을 함께 했고 사랑하는 아이를 얻었다. 그걸로도 난 이미 충분히 대단하고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힘든 과정은 결국은 다 지나가니까 인생에서 정말 사랑했던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로 큰 축복일 테니까.
영화를 보고 분명해진 것이 있다. 여전히 나는 '사람은 결혼을 꼭 해야한다.'라는 생각엔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누군가 나에게 '결혼이 하고 싶어?'라고 물으면 '응'이라고 대답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를)것 같다. 내가 내 힘으로, 내가 선택한 운명으로 만든 나의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 주어진 가족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만들어진 그런 가족.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나를 잃지 않으면서 현명하게 헌신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