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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Jan 21. 2020

미래의 슬픔에 불안해하지 않는 연습

8개월간의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마치며


나는 타이레놀 알러지가 있다. 지난 해 봄 나는 울다 지쳐서 그 때의 연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빠 내가 타이레놀을 왕창 먹으면 죽을까?"

그는 대답했다.

"간에  무리가 가겠지 죽지는 않을거야."


살면서 단 한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때는 모든 것을 다 떠나버리고 싶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일들이 너무 고되고 잔인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우리 엄마는 3년이 넘게 희귀 뇌질환으로 투병을 하고 계신다.


처음에는 갱년기 증상인가 싶었고 그 후에는 이석증인가 싶었다. 하지만 점점 더 어지러움이 심해지면서 아빠는 엄마의 병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위해 서울에 있는 모든 대학 병원들을 다니셨다.


신촌 세브란스, 대학로 서울대 병원, 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안암 고대병원, 경희대병원. 정말 하나도 빠짐 없이 수많은 병원을 다녔지만 어느 곳에서는 파킨슨, 어느 곳에서는 상세불명의 희귀질환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중 가장 비슷한 것은 다계통 위축증. 파킨슨과 비슷한 신경계 퇴행성 희귀 질환으로 몸의 움직임을 조절하거나 근육, 혈압, 땀, 소화기 등 뇌가 관여하는 모든 기관에 이상이 생긴다. 치료법도 약도 없다. 그저 병이 더디게 진행되길 기도하는 수 밖에는.

 

 

 워낙 엄하고 보수적인 집에서 자란 나는 늦은 밤 엄마의 전화를 받는게 그렇게 무서웠다. 심지어 내 지인들 중에는 나랑 술 마시다가 우리 엄마에게 혼이 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런 엄마가 조금씩 발음이 퇴화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몇 마디를 겨우 소리 내어 불분명한 발음으로 나에게 전달한다.


백두대간 종주는 물론이거니와 서울에서 당일치기로 한라산을 다녀오시고 주말이면 기본으로 4시간씩 등산하시던 엄마는 2017년 중순부터 조금씩 움직임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지팡이를 그 다음엔 보행기를 짚고 걸어다니시던 엄마는 이제는 무릎 보호대를 끼고 바닥을 겨우 기어다니신다.


내가 엄마 몰래 아빠의 맥주를 사들고 가면 "또 둘이서 짜고 나 속이려고 그러지!" 하고 귀엽게 핀잔을 주셨다. 엄마가 나에게 클럽 가지 말라고 하자 "나도 엄마 야간 산행 가는거 싫어!" 하고 싸우곤 했다. 내가 웨이크 보드를 몇번이나 실패하자 "그거 별거 아니야. 다시 한번 해봐!"라며 대장부의 면모를 보여주셨다. 엄마는 늘 강했다. 똑똑했고 다부졌다. 그런 엄마가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결벽증이 있는거 아니냐며 놀라울 정도로 깔끔했던 엄마는 더이상 밥을 흘리지 않고는 식사를 하실 수 없다.


나는 그 모습을 보는게 너무 괴로웠다. 30년 가까이 엄마가 나의 가장 크고 거대한 보호자였는데 마치 하루아침에 그 보호자를 잃은 느낌이었다. 부모님이 더이상 나를 보호해줄 수 없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면서 연인에게 자꾸만 마음의 빈 곳을 채워주기를 기대했다. 그 기대감이 나를 더 옥죄어 올 때쯤 나는 정신과를 찾았다.



정신과가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절망적인 기분으로 정신과를 찾은 건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는 마치 사주 카페에 가듯이 나의 심리를 알고 싶어서 나를 배우러 갔다면 이번엔 나를 찾으러 갔다.

길지 않은 상담을 마치고 선생님은 대뜸 약을 처방해주셨다.


"선생님 그런데 왜 제가 약을 먹어야 하나요? 처방을 해주시는데 기준이 있으신가요?"

"지금 시온씨는 무기력함을 말씀하셨잖아요. 슬픔을 참고 누르는데 모든 에너지를 써서 더이상 다른 것을 할 여력이 없다구요. 약을 먹게 된다면 약이 슬픔을 누르는데 도움이 될거예요. 그러면 다시 시온씨의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거예요"


그렇게 나는 매주 병원을 찾았다. 처음 다녀왔던 정신과와 다르게 선생님은 대부분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처음 한달간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정신과를 다님과 동시에 운동을 시작했고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변화했다. 마음은 마치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에 떨어져 있더라 해도 남은 힘을 모두 끌어 모아 수레로 그 마음을 우물에서 끌어올리려고 애썼다.



약은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로 이루어져있었다. 대학병원 정신과에서 임상심리사로 일하는 친구의 말로는 본인도 먹어본 경미한 수준의 항우울제와 항불안제이기 때문에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친구는 석사 시절 과도한 스트레스로 목이며 어깨가 너무 아팠을 때 이 약을 처방 받았다고 했다.


약을 먹고 안 먹고의 차이를 크게 느끼진 못했다. 저녁에 먹는 항불안제는 잠이 잘 오도록 도와준다고 하는데 이걸 먹는다고 해서 잠이 안오는지 실험해 본 적이 없었다. 주는 대로 꼬박 꼬박 약은 안 빠지고 챙겨먹는 약국 모범생이었다. 음주나 여행으로 오랜 기간 저녁 약을 챙겨먹지 못하면 선생님은 "불안한 것은 좀 괜찮나요?"라고 물어보셨다.


내가 느끼는 불안은 이러했다.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 혹시나 엄마가 떨어진 건 아닐까 넘어진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오랜 시간 안방에서 기척이 없으면 혹시나 엄마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신건 아닐까 불안했다. 근육의 마비로 인해 주무실 때 숨소리가 크게 나시는 엄마의 잠자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 들었다. 이러한 불안은 사실 엄마로부터 시작된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겁이 많았다. 불안 수위가 높아서 술이 취한 사람들을 보거나 공격적인 사람들을 보면 덜덜 떨었다. 평화롭거나 잔잔하지 않은 분위기에서는 스트레스가 심해졌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런 불안함이 이제는 특정한 주체로 옮겨간 것 뿐이었다.



매주 정신과를 다니는 것 이외에도 나는 나의 마음을 위해서 노력했다.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명확히 찾았다. 어수선한 주변을 보면 스트레스가 심해지는 것을 깨닫고 매주 한번 청소 하는 날을 정했다. 또한 매일 아침 아무 생각 없이 헬스장에 가서 달렸다. (첫 100일동안 7kg 정도 빠졌는데 선생님은 내가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우울증인줄 아셨다고 했다. 그저 열심히 운동한 것 뿐. 이건 팩트다..)


옛 연인의 정신적 스승과도 같은 법륜 스님의 영상을 매일 아침 런닝머신 위에서 보았다. 처음엔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보기 시작했다면 이제는 나의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 계속해서 보는 나를 발견했다. 명상을 시작했고 직접 요리를 하고 나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생각의 흐름을 조금씩 천천히 가져가기 위해서 애썼다.


물론 모든 날이 쉬운 건 아니었다. 또 다시 불안에 떨고 또 다시 눈물로 밤을 지새고 그런 날들도 분명 있었지만 적어도 나의 감정을 감정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힘이 길러졌다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감정을 그저 감정으로만 바라보는 연습. 그 감정이 나의 삶을 잠식하지 않도록 분리해내는 연습. 나는 명상과 일기 쓰기, 정신과 치료, 독서 등을 통해 조금씩 내 삶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약을 그만 먹는다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의 마음의 평화가 약에서 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마음의 힘을 믿지 않았다. 약을 그만 먹는다면 다시 예전처럼 마음이 곧 빠져버릴 초등학생의 유치처럼 흔들거리며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오늘 정신과를 향해가는 길에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왠지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아'


"약을 그만 먹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네. 이제는 때가 된 것 같아요. 예전엔 약을 안 먹는게 두려웠는데 이제는 그만 먹어도 될 것 같아요."

"처음 왔을 땐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고 이런 내가 아닌데,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괴로웠다고 했잖아요. 지금 모습은 예전처럼 돌아온 것 같아요?"

"아니요. 더 나아진 것 같아요."


늘 무표정인 선생님은 나의 말에 눈을 크게 뜨며 싱긋 웃어주셨다.

정말로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정신과를 처음 오기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예전엔 막연히 '슬프지 않아야 한다', '담담해야한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슬퍼도 된다. 슬픔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의 감정을 다룰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선생님. 그러면 저 이제 더이상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네 지금으로 봐서는 이제 약을 그만 먹어도 될 것 같아요."


"선생님 과거의 저는 마냥 행복하기만 하고 즐겁기만 해야했거든요. 그래서 슬픔이나 괴로움이 찾아오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밀어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막상 이렇게 짧지 않은 시간동안 깊숙히 그런 감정을 겪고 나니 한층 더 성숙해지고 제가 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아서 기뻐요. 앞으로도 분명히 슬프고 괴롭고, 무기력하고 그런 날들이 오리라는 것도 알아요. 그리고 그런 날이 오는 것이 크게 무섭지 않아요. 지금의 제 모습이 참 마음에 들고 그런 날들이 오더라도 그저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흘러가길 편안하게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동안 선생님과 대화할 땐 슬픔이나 우울함에 울컥하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았다. 마지막 상담에서는 엄마, 옛 연인의 이야기를 많이 했음에도 단 한번도 울지 않았다. 내가 나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뭉클한 마음이 피어올라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내가 대견하기도 하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고맙다는 생각도 들고 여러가지 감정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잘 지내시구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선생님은 그동안 늘 '잘 지내시구요. 다음주에 뵐게요' 라고 작별 인사를 해주셨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언제 보자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내가 애교 있는 목소리로 '감기 조심하세요', '성탄절 잘 보내세요' 이런 추임새를 넣어도 별다른 대꾸가 없는 선생님이셨는데 오늘은 환히 웃는 얼굴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나의 인사에 똑같이 새해 인사를 해주셨다.



예전엔 참 무서웠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들이 다가올까봐 무서웠다. 그리고 그 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낄지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두려웠다.


앞으로도 별다른 약이나 치료법이 없는 엄마의 병은 점점 더 엄마를 아프게 만들 것이다. 나의 상황은 어쩌면 지금 보다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고 있다. 상황이 얼마나 나빠지던간에 그것을 대하는 내 마음은 지금보다 더욱 더 단단해져 있을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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