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참으로 과일 같은 삶

따뜻한 바르셀로나 1

by 리아

축구, 투우, 플라멩코, 이 모든 것이 담긴 정열의 나라 스페인. 사실 잘 알지 못하는 나라였고 아는 도시라고는 직업 특성 상 알게 된 항구 바르셀로나와 수도인 마드리드 뿐이었다. 여행 준비 당시 가장 유명하고 볼 것이 많은 나라 세 군데만 가자고 마음 먹으면서 스페인을 끼워 넣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은 이상하리만치 관심을 갖게 된 건축 분야 때문에, 천재건축가 가우디로 유명한 바르셀로나를 선택했다. 정말 ‘어쩌다가’ 였다. 물론 하도 여행 관련 서적들을 보아왔기에 스페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기는 했으나 내가 제일 사랑하고 또 꿈꿔온 프랑스에 비하면 스페인은 이번 여행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사실은 로마가 바르셀로나보다 훨씬 기대가 컸던 도시였다. 문화 유적지와 옛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쓸쓸해져도 괜찮겠다며 싱글룸이 있는 호텔에 묵기로 결정하여 마침내 도착한 바르셀로나는, 생각 외로 너무나 따뜻한 곳이었다. 파리에서느꼈던 순간순간의 작은 위협감도 느낄 수 없었고, 지도를 보고도 길을 찾지 못하는 내가 마음 가는 대로걸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어느 곳을 가든 그 동네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꼭 재래시장을 가보라고 한다. 온갖 할인카드와 다양한 주전부리, 그리고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찾아볼 수 있는 편의점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 나는 한국에서 재래시장을 가지 않았다. 간혹 장이 섰을 때 혹은 명절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시장을 간다는 엄마를 따라 몇 번 가본 것이 다였다. 정신 없고 사람들이 많고 그래서 쾌적함과는 거리가 먼 재래시장은 나와 잘 맞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 내가 외국을 나가면 꼭 가장 유명한 시장을 찾아서 가보곤 했다. 사실 우리나라는 너무 잘 알아서 가지 않았다. 유명하고 특색 있는 시장 먹거리가 있고 시끌시끌하며 때론 발 디딜 틈도 없는 곳. 우리나라의 시장은 너무나도 뻔했다. 물론, 외국의 시장도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우리나라와는 달리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곳이라는 이유 때문에 여행을 가면 항상 방문했다. 파리는 워낙 도시적인 곳이라 딱히 ‘재래시장’이라 말할 곳이 없었지만 바르셀로나는 달랐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보케리아 시장이었다. 이름만으로도 어딘가 정겨운 기분이 들었다. 바르셀로나는 정사각형 모양으로 길이 나 있는 계획 도시였고 그래서 나와 같은 길치도 길 찾기가 수월했다. 처음 가는 보케리아 시장을 찾아가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 안의 모습은 여느 시장과 다르지 않았지만,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매대에 알록달록하게 줄 맞춰 놓여있는 온갖 과일이었다. 정말이지 눈에 들어온 것이라고는 선명한 색깔을 머금은 과일들 뿐이었다.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의 옛날 꿈 중 하나에는 과일을 식탁 위에 쌓아놓고 먹는 것이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엄마랑 식탁에서 과일을 먹으며 들은 말이었다.

나는 먹고 싶은 과일이 있다고 하면 항상 엄마가 사다 주었고 늘 비타민을 먹어야 한다며 먹기 싫은 순간에도 손에 과일이 들려 있었다. 내게는 너무도 당연했던 맛있는 과일이 엄마의 어릴 적에는 하나의 꿈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 조금은 서글퍼졌다.

물론 나 역시 한국에서 쉽게 먹을 수 없는 과일도 있었다. 망고와 같은 열대 과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다 비싸기 때문이었고사실 대중적이지 않아서 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보케리아 시장에 들어와 과일을 보자마자 생각했다. 한국에서 잘 먹지 않는 과일을 먹겠다고. 그래서 고른 것이 체리와 메론이었고 또 하나는 한국에서 너무 많이 먹던 것이라 살짝 망설였던 귤이었다. 시장에서 까먹을 수는 없어 함께 시장을 간 스무 살의 어린 동행 친구와 바로 과일을 갈아 준 단돈 1유로 짜리 과일 주스와 컵과일을 얼른 먹고, 과일을 양손 한 가득 사 든 채 호텔로 향했다. 파리와 달리 따뜻한 바르셀로나에서의 둘째 날이었지만 사실상 늦은 밤 도착했기에 관광으로는 첫 날이었던 이 날. 양손에 가득 무거운 열대 과일들 때문에 호텔 가는 길이 힘들었지만 횡단보도에 멈춰서 바라본 바르셀로나의 노을과 기대를 잔뜩 머금은 과일들 덕분에 괜스레 기분 좋아지는 하루였다.

노을 너무예쁘다. 얼른 가서 과일 먹어보고 싶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좋다. 내 인생 지금 들고 있는 과일들처럼 참, 달콤하다. 이런 생각이 가득했다. 고작 신호를 기다리며 보는 노을이고 단돈 몇 푼의 과일일 뿐인데, 삶의 기분이 꼭 지금만 같았음 좋겠다 생각했다.

비록, 제일 크고 무거웠던 메론은 과일 장수의 농간에 넘어가 제대로 익지도 않은 것을 가져온 탓에 맛있게 먹지 못했지만 말이다. 언제나처럼 익숙한 것이 실패할 확률이 적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귤은 타지에서 맛보는 새로움에 한층 더 달달한 것만 같았다. 가격은 더 싼데 제주의 천혜향과 비슷한 달콤함이라니, 이것은 먹고 싶었던 열대 과일보다도 더 환상적인 맛이었다. 매일 저녁 마트에서도 귤을 사 먹을 것이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했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는 말을 귤을 까먹으며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20170113_173653_HDR.jpg
20170113_163805_HDR.jpg

2017년 1월 13일, 보케리아 시장에서 양손 가득 과일을 사들고 가는 길. 행복하다, 행복하다, 행복하다.


바르셀로나를 선택한 이유는 가우디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한 친구 때문에 건축에 관심이 생기고 나서부터 가우디에 대해서도 알아보게 되었으니 꽤 오래 된 관심사였다. 물론 여전히 바르셀로나는 온전히 가우디의 도시였지만, 이 날 시장의 과일과 귀가하는 길의 노을은 잊을 수 없었다. 바르셀로나는 내게 감히 가장 따뜻한 지중해의 보석같은 도시가 되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달팽이 한 마리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