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로마 1
고대 문명과 유적지를 좋아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런 문물을 보고 있으면 현재를 지금 이 시간을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로마는 내게 시간이 멈춘 도시였다. 사실 파리와 바르셀로나 모두 로마보다도 훨씬 훌륭하고 매력적인 도시라 말하며 당시에는 로마를 제일 평가 절하했는데 조금은 후회스럽고 또 미안하다. 로마는 그 자체만으로도 시간이 과거에 머물러 있듯이 잘 보존된 도시이지만, 내게는 더더욱 나를 시간 속에 가둔 도시였다.
내가 이곳에서 만큼은 더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 탓도 있었다. 마지막 여행지였기에 더 힘내서 돌아다닐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접었다. 그렇게 많이 구경하고 다양한 것들을 본다 한들 전부 마음 속에 담을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서였다. 파리나 바르셀로나에서도 일부러 3군데 이상은 일정에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아무리 사진으로 전부 남기고 또 습관대로 기록한다 해도 진정으로 마음 속에 남기기란 무리니까 말이다.
온전히 시간을 멈추어 간직하기 좋은 곳은 내게, 트레비 분수였다. 트레비 분수는 무려 두 번이나 찾은 곳이기도 했다. 이곳이 비단 로마의 명소라서가 아니라 인연의 시작이자 끝이여서였다. 이탈리아에 입성해서 제일 먼저 인연을 맺게 된 일본인 남자를 두 번째로 만난 곳이었고, 그에 앞서 파리에서 함께 지낸 스물 다섯의 동생과 바다 건너 다시 조우한 만남의 장소였다. 숙소와 그다지 멀지도 않았고 가장 쉬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로마 구경을 시작한 둘째 날 저녁, 그야말로 로마의 핫 플레이스였던 트레비 분수는 생각보다 매우 컸고 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관광객의 부탁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나와 파리에서 만난 동생도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아마 둘이 찍은 사진은 그게 처음이었을 것이다. 파리에서는 워낙 떼로 다녔으니 말이다.
사진을 찍고 너무도 당연하게 동전을 던지는 행위를 했다. 동전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며 작은 소원을 빌었다. 그냥 습관 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이 만든 정형화된 관습 속에는 언제나 그 후 소원빌기가 있었다. 어쩌면 '소원'이라는 것을 타인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입 밖으로 내뱉어 말하기 어렵고 쑥스러워 꼭 그런 관습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한 번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온다고 했다. 두번을 던지면 헤어진 사람과 온다고 했고, 또 세 번 던지면 또 다른 이유와 함께 찾아온다고 했다. 그저 미신이겠지만 그 미신을 믿으며 내 마음을 전부 트레비 분수에 고이 모아 던질 수 있다는 것이 그저 행복할 따름이었다.
내가 동전을 몇 번이나 던졌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 횟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 다시 꼭, 오게 해주세요.
언제, 누구와 함께, 어떤 이유 때문인 것 또한 중요하지 않았다. 여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이런 미신을 믿으며 꼭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한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이 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꼭 그런 아름다운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길 바랐다. 희망의 끝에는 절망도 있기 마련이지만 그 과정만큼은 행복할 테니 말이다.
트레비 분수에서 다시 만난 일본인은 이탈리아에 발을 내딛은 첫 날 만난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주로 유럽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유레일 패스를 이용해 다양한 나라를 기차로 쉽고 빠르게 여행 다닌다고 했지만 나는 특이하게도 스페인에서 로마로 갈 때 '배'를 택했다. 바로 그 배를 함께 타고 온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었는지 한 번 쯤 배를 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바르셀로나에서 로마까지는 지중해를 건너가므로 그 아름답다던 지중해의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겠다는 부푼 희망을 안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희망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 버렸다. 총 이틀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잡아먹을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은 매우 적중했고 나는 로마 시내에 도착해서도 한참이나 배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불안함에 택시를 타 바르셀로나 항구에 두 시간 전에나 도착했고 택시비는 예상을 훨씬 뛰어 넘어 배가 넘게 나왔으며 날씨 탓에 출항은 무려 세 시간이나 늦어지기도 했다. 스페인을 떠나 이탈리아로 가는 길은, 아니 바다는 승선 후에도 역시나 험난했고 나는 결국 20시간 중 거의 15시간을 고립된 지중해 위에서 배 멀미와 싸우며 버텨내야 했다. 아름다운 지중해의 일출과 일몰을 보겠다던 나의 커다란 꿈은 지중해의 성난 파도에게서 빼앗겨 버렸다. 바다의 어쩌면 더 크게 자연이라는 그 거대함 앞에서 나의 마지막 여행지의 시작은 무참히 상처받았다.
사실 로마를 보다 깎아내린 이유는 위와 같기도 했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로마를 위해 오는 시작이 너무나도 좋지 않아서 말이다. 정말 몰랐다. 배 멀미가 도착 그 이후 다음 날까지도 나를 괴롭힐 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사히 로마 숙소에 도착해 있었고 치비타베키아 역까지 나를 데려다 준 고마운 이탈리아 아주머니도, 함께 마지막 기차를 타고 안전하게 숙소까지 데려다 준 인상 좋은 일본인 남자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매우 고마운 인연이었다. 항구 근처 역에서 로마 테르미니까지 함께 한 일본인과는 우연에 우연을 더해 또 그렇게 인연이 되었다. 수많은 계단 앞에서 큰 나의 캐리어를 망설임 없이 들고 오고 가준 그를 이튿날 밤 트레비 분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나는 참으로 기뻤다. 비록 로마의 처음은 나를 매우 고단하게 했지만, 이 모든 인연 덕에 잠시 잠깐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사람은 그런 존재였다.
힘든 여정이 아닐 수 없었다. 지친 몸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고 또 그 때로 돌아간다해도 그 '배'에 탑승하고 싶은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람'때문이다. 비록 지중해의 환상적은 일출, 일몰은 만나지 못했으나 나는 보다 값진 인연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자연이 아닌 사람 덕분에 아름다운 시간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의 모든 과정이 우연의 연속이었지만, 우연이 쌓이고 쌓이면서 결국엔 하나의 '인연'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