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바르셀로나 2
술을 좋아하지만 술을 잘 마시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가급적이면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려 했고 낯선 곳에서는 웬만해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작년 말부터 쓸데없이 술자리를 즐겼고 또 잦은 술자리 때문에 과음하는 일 또한 잦아졌다. 한 번 취하는 것이 어려웠지 그 이후부터는 쉬워지기 시작했다. 파리에서는 이렇다 할 만큼 취해보지 않았다. 그저 와인 한 잔, 맥주 한 잔, 혹은 자정이 넘은 시각에 즐기는 칵테일 한 잔이 전부였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한 잔’에도 기분 좋게 헤롱헤롱 거렸겠지만 나는 꽤 많이 달라져 있었다.
바르셀로나는 참으로 따뜻한 도시였다. 도도한 매력의 파리와 다르게 정말로 따뜻한 기운이 훅 내 가슴속으로 치고 들어왔다. 비단 지중해의 국가여서가 아니었다. 그저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이 따듯하게만 느껴졌다. 파리에서 너무 겁을 집어 먹고 시작을 한 탓에 여러 명과 함께 술자리를 즐기는 일만 있었다. 그게 조금은 아쉬웠는지 나는 용기를 내 바르셀로나에서의 첫 혼술을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곳 사람들은 낮에 즐기는 한 잔의 샹그리아가 당연한 것인 사람들이었다. 점심시간도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고 술 한 잔이 곁들여져 나른한 오후를 보내는 것이 일상이라고 했다. 참으로 부러운 삶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일을 하면서, 특히나 더운 여름 사무실에서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도 가장 간절했던 것이 적당한 알코올 농도의 맥주 한 잔이었으니, 이곳 사람들의 이 여유로움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도시의 따뜻한 기운은 다름 아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문득 나 역시 여기서 산다면 훨씬 따뜻한 마음을 품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포근함이 한 사람의 성향까지도 바꿀 수 있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겨우 샹그리아 한 잔이었다. 꽤 둥근 와인 잔에 담겨 나온 one glass of sangria는 오전 내 내 체력으로는 너무나도 벅찼던 가우디 반일 투어에 지친 내 심신을 달래주기 충분했다. ‘겨우’ 한 잔에 불과했지만, 그 새콤달콤함에 나는 금방이라도 다시 투어를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함께 먹은 타파스 두 개는 내게 꽤나 많은 양이었기에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워낙 감자를 좋아해서 남은 것을 포장이라도 해서 가지고 가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그런 내 모습은 더욱 나를 이방인으로 볼 게 분명해 그만두었다. 유행하는 ‘단짠단짠’을 즐기는 동안은 정말 몰랐다. 혼술에도 익숙해지겠다 마음먹으며 시작한 이 한 잔이 아쉬운 바르셀로나의 밤을 통째로 앗아갈 줄은 말이다. 비틀비틀 거리며 간신히 호텔까지 간 나는 떨어져 내려오는 눈꺼풀을 감당하지 못해 알람을 맞춘 뒤 침대에 그대로 엎어졌다. 늦은 점심이자 낮술을 한 탓에 그때, 4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어떤 꿈을 꾸었다.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꽤 달콤했는가 보다. 목이 말라서였는지 꿈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입맛을 다시며 눈을 뜬 나는 가뜩이나 빨리 지는 겨울의 유럽에 이미 해가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차 싶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해 오전 내 알찬 가우디 반일 투어를 마쳤지만 그래도 아쉬운 나의 반일이 날아가 버려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그랬다. 자는 것을 좋아하지만 자고 나면 꼭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버린 시간을 후회했다.
일단 잠에서 깨면 마치 오늘 하루만 사는 것처럼 바쁘게 살려고 했다. 어쩌면 습관이었고 또 어쩌면 시간에 대한 작은 강박이었다. 마음을 놓고 사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내게는 긴 이 여행 동안 잠시라도 놓으려 했던 마음을 샹그리아 한 잔에 겨우 놓은 듯했다. 아쉬웠지만 이곳의 사람들처럼 마음의 여유를 가진 것만 같아 또 한 편으로는 변한 내 모습에 고맙기도 했다.
물론 나는 곧바로 일어나 돈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낮의 가우디 도시를 보았으니 이제는 밤의 가우디 도시를 볼 차례라 생각했다. 그래도 며칠 되었다고 밤거리도 무섭지 않았다. 한 겨울임이 분명했지만 그런 찬 바람보다 도시의 후끈한 기운 덕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이고 걸었던 길이라 그런지 익숙했고 밤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밤을 즐기는 바르셀로나 사람들에게 동화되어 마침내 카사 바트요에 도착했다. 아침에 본모습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동화 속의 세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과 같은 공간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보아서 그런지 알록달록한 불빛을 내뿜으며 자리하고 있는 카사 바트요는 더욱 신비해 보였다. 끝내 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더 오랜 시간을 깨어 있지 못한 하루였지만, 하루에 무려 두 번이나 마주한 카사 바트요와 늘 내 마음속에서 나만을 위한 집을 지어주던 가우디 선생 덕분에 동화 같은 꿈을 꿀 수 있었다.
2017년 1월 17일, 이토록 맛있는 타파스와 푸짐한 한 잔의 샹그리아라니!
2017년 1월 17일, 밤에 더 동화 속 같았던 가우디 선생의 걸작, 카사 바트요.
유럽 국가들이 물가가 비싼 곳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파리보다는 싼 물가라 생각하고 마음 놓고 지냈지만, 예상치 못한 입장료에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 만나길 고대하던 가우디 선생의 걸작 앞에서 비싼 입장료 때문에 망설이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나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고 동화 속의 세상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은 성인이 되어버린 탓이었다. 다만, 꿈에서만큼은 여전히 호기심 많은 아이일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