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등을 위한 밤 4, 마지막

인아와 태정 이야기

by 리아

시장 골목을 벗어나 대로변이 나오자 취기가 가셨다. 태정은 택시를 미리 불렀는지 콜택시 기사와 통화 중이었다. 잠시 후 까만 모범택시가 우리 앞에 섰다.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늦은 시간에 들어가더라도 나는 결코 모범택시를 잡지 않았다. 비단 비싼 택시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모범택시를 잡는 이유는 거래처와의 술자리가 끝난 이후 혹은 상사와의 회식 이후 상전처럼 모셔야만 했던 그들의 귀가를 위해서였다. 나는 종종 그들의 안전 귀가를 기원하며 터덜터덜 회사 앞 내 오피스텔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새벽의 찬 공기가 폐 깊숙이 파고들어 피곤함마저 날려버린 어느 날이었다.

“타세요. 멀지는 않지만 그래도 안전 귀가하셔야죠.”

“우리 집을 알아요?”

“회사 앞 오피스텔이잖아요.”

택시 뒷좌석 문을 열어주고 있는 그를 지긋이 바라보고는 그의 팔을 살짝 잡아끌어 같이 택시에 탑승했다. 그는 무방비 상태로 끌려 들어왔고 택시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의 침묵과 조금 전의 행동이 그저 혼자 타는 것이 겁이 난 내가 기댈 데가 필요하여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랐다.

오피스텔 앞에서 내리자 어둠이 짙게 깔린 회사 건물이 멀리 보였다.

차 한 잔 할래요?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집으로 함께 올라가는 계단이 평소와 달리 무섭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자 뜨거운 기운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집이다. 야근을 하고 돌아오면 자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는 곳이지만 집은 나의 불안을 감해주는 공간이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찬장을 열어보니 예전에 해외여행을 다녀오던 길에 잔뜩 구매한 선물용 티백이 한 무더기가 있었다. 여유를 만끽하며 집에서 차 한 잔도 못한 내 평소 모습이 반영되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의 숙취를 대비하여 꿀이 든 티백을 꺼냈다. 딸깍. 커피포트의 물이 다 끓었다는 소리가 났고 이사를 한 이후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머그잔을 펄펄 끓는 물로 헹궈냈다. 티백을 넣으니 물의 색이 점점 노랗게 변해갔다. 나는 갑자기 술이 확 올라오는 듯하여 화장실로 달려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육회를 게워내지는 않았다. 신물만 조금 올라왔다.

화장실에서 나와보니 그는 바닥에 쓰러지듯 엎어져 자고 있었다. 아마 나를 신경 쓰느라 기운을 모두 소진했는가 보다. 귀가했을 때 집에 찬 공기가 맴도는 것이 싫어 난방을 틀어 놓고 출근하여 집안이 온통 후끈했다. 더운 공기에 그는 긴장이 풀리며 스르르 잠에 든 것 같았다. 나는 그를 깨울 수 없었다. 스스럼없이 여자 혼자 살고 있는 집에 와 바닥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를 위해 탄 차는 침대에 기대 내가 마셨다. 바닥에 누워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는 그를 깨울까 말까 차를 다 마실 때까지,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창 너머로 들리던 차 소리는 새벽 세 시가 넘어가자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이불만 살짝 덮어주고는 나 역시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 알람을 확인하려다가 문득 내일이 토요일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는 오랜만에 누군가와 동침, 한 침대는 아니지만 한 공간에서 자는 것, 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멈추어 버린 듯 세상이 고요했다. 눈을 감자 나의 숨소리가 폐를 타고 올라왔다. 잠시 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숨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우리의 들숨과 날숨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일정한 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꿈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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