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맑음 1

재하 이야기

by 리아

같은 길을 매일 아침 지나다 보면 꼭 마주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도 그럴 것이 3동에 사는 사람들이 운동하는 길은 이 한 길 뿐이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나와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같은 동네 사람들이라 서로 일면식 정도는 있었다. 그런 그들의 사이에 어느 날부턴가 밝게 인사를 건네는 젊은 남자가 끼어들었다. 재하였다. 낙엽이 거의 다 떨어져 갈 때 즈음이었고, 훤칠한 외모와 가히 엄청나다고 말할 수 있는 친화력 덕에 그의 3동 입성은 금세 소문이 났다. 앞만 보고 달리고 시선을 회피하며 제멋대로 운동을 즐기던 사람들은 그가 나타나고 나서부터 서로 눈인사 정도 나누었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에 대항하듯 주민들 사이에는 아주 조금씩, 너무 살랑대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는 꼭 새벽 여섯 시가 되면 집을 나서서 운동을 마치고 8시에 귀가를 했다. 늘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있어 이제 3동의 모든 주민들이 그의 운동 시간을 알고 있었다. 그와 제일 먼저 인사를 나누며 친하게 지낸 사람은 다름 아닌 경비 김씨였다. 김씨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예순 언저리의 남자였고 소싯적에 운동을 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꽤나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였다. 재하가 3동으로 이사 오기 이전에는 정말이지 김씨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인사를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김씨를 필요로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항상 사람들에게 말을 걸려는 그를 귀찮아했다. 주민들에게 경비란 그런 존재였다. 그런 주민들과 달리 재하는 아버지가 떠오른다며 김씨에게 언제나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고 수다스러운 김씨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면 준비 운동을 하는 내내 말을 받아 주었다. 그는 훌륭한 청년이 이사 왔다며 사람들에게 재하의 이야기를 하느라 결국 더 많은 말을 하는 귀찮은 경비가 되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선생님.

재하는 꼭 김씨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딱히 무어라 부를 호칭이 떠오르지 않는 탓이었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아저씨라고 부르기에는 그도 사회에서 어느 위치에 앉아있던 존경받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선생님’이라 불리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 눈치였다. 분리수거가 제대로 되지 않아 씩씩거리며 다시 분리수거를 하다가도 그가 지나가며 인사를 건네면 곧 웃음으로 화답했다.

“청년은 참 인사성도 밝고 말이야. 부지런해. 가정교육도 잘 받았나 봐.”

김씨의 수다는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는 늘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목례를 하고는 준비 운동을 하면서 김씨의 곁에 잠시 머물다 갈 뿐이었다.

사실 재하에게는 부모님이 안 계셨다. 사람들은 모두 화목한 집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어렸을 적 부모에게 버림받아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그가 입양된 고아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3동에서 그는 귀한 집에서 곱게 자란 도련님이었다. 그가 조깅을 마치고 귀가할 때 즈음에 꼭 집을 나서며 그에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기 시작한 ‘아줌마 부대’가 있는데, 그녀들에게 그는 신비하고 알고 싶은 존재였다. 원래 아이들이 모두 등교한 후에야 하나둘씩 집을 나서서 운동을 하러 가던 사람들이었으나, 그가 이 동네에 이사 온 뒤로는 서로 짜기라도 한 듯이 그의 귀가 시간에 맞추어 운동을 가기 시작했다. 보기 드문 쾌남에 호남이기까지 하다며 모두들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한 마디라도 더 하려고 애를 썼다. 동네 아줌마들은 그와의 아침 인사를 마치고 운동을 하며 그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필시 부잣집 도련님이 독립을 위해 혼자 나와 살기로 결심하고 보다 작은 동네로 이사를 온 것이라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대화가 단절되었던 3동에 시답잖은 수다에 불과하지만 주민들의 교류가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그는 눈치로 여자들의 수다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알면서도 늘 경비 김씨를 대하듯 밝게 그녀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재하의 입성 이후 한 계절이 지난 어느 월요일이었다. 늘 아침 이른 시간에 조깅을 위해 나서던 그가 잘 차려 입고 아파트를 빠져나가려는 참이었다. 경비원 김씨는 이 틈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그가 재하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며 은근슬쩍 칭찬을 던졌다.

“좋은 아침이야, 재하 청년. 오늘은 말쑥하게 차려입은 것이 꼭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어.”

김씨의 농담 섞인 이야기를 잘 받아주던 평소와 달리, 그는 싱긋 웃으며 목례를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을 향해 내려갔다. 그의 손에는 무거운 무언가가 잔뜩 든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김씨는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갸우뚱했지만, 이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잎사귀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차장에 세워둔 SUV 트렁크에서 2리터짜리 생수 여섯 병을 꺼냈다. 이제 그의 한 손에는 무언가 무거운 것이 든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보기만 해도 무거운 생수 여섯 병이 있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검은 정장과는 꽤나 어울리지 않는 짐들이었다. 주차장에서 양손 가득 무거운 짐을 들고 나온 그는 3동 아파트에서 1킬로가량 떨어진 상가로 걸어갔다. 어딘지 급해 보이는 발걸음을 눈치챈 경비원 김씨는 더 이상 그를 불러 세우지 않고 그의 뒤꽁무니에 시선을 두었다. 입이 간질거렸지만 꾹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침 일찍 그가 무거운 것들을 들고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작은 동물 병원이었다. 꽤 오래 주인 없이 그 자리를 지켜오던 동물 병원이었다. 그래서인지 동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동네에 동물 병원이 있다는 것을, 어쩌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동안 먼지만 쌓여가던 동물 병원에 새 주인이 들어서게 되었다. 바로 3동의 떠오르는 스타, 재하였다. 그가 동물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때는 다름 아닌 미국으로 입양 간 이후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그는 이방인이었고 그런 그에게 아무런 적의 없이 다가온 것이 고양이였다. 동네에는 우리나라 못지않게 길에 고양이가 많았고 그는 고양이들과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그를 데리고 간 양부모는 그가 보다 좋은 환경에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자립하여 한국으로 들어온 그는 강아지도 좋아했으나 자신과 처음 유대 관계를 맺은 고양이를 위한 전문 동물 병원을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에게는 조금 낯설지 모르는, 고양이 전문 동물 병원이 그의 일터가 된 것이었다.

문을 열자 방울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고 모두 어딘가에 제각각 자리를 잡고 밤을 보낸 고양이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생수와 장바구니를 내려놓자 마치 차례로 아침 인사라도 하는 듯 다가와 그의 손길을 갈구했다.

안녕. 잘 해보자 우리!

그는 그릉거리는 고양이들을 차례로 쓰다듬어 주며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누며 말했다. 그와 다정한 아침 인사를 주고받은 고양이는 모두 6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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