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이야기
팔자에 없는 소개팅이라니. 내가 나오고 싶어서 나온 건 아니야. 알잖아, 왜 꾸준히 나를 팔아서 남자친구 기 좀 살려주려고 하는, 그래, 소연이. 소연이 남자친구의 친구들이 솔로가 그렇게 많다나 뭐라나.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은근히 이번에 만나게 하려는 속셈인 것 같았어. 진짜 좋은 카페라면서 나를 데리고 나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처음 보는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소연이는 너무 오래 봐서 이제 뒷통수만 보고도 찾아낼 수 있거든. 소연이 뒷통수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 낯선 소개팅 남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몰라. 물론, 나를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다 못해 돌아가 버린 소연이가 우렁찬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운 것도 한몫 톡톡히 했지. 모른 체 그냥 돌아갔더라면 아마 이 사람과는 이렇게 마주하고 있지 못했겠지? 맞아, 싫다는 건 아니고. 정확히 이 유명하다는 카페에 앉은 지 17분이 지났어. 소연이? 아까 갔어. 소연이 남자친구가 계속 소연이 옆구리를 찔렀거든. 안 보일 줄 알았나. 정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가라고 하니까, 글쎄, 뒤도 안 돌아보고 가방 들고 팔짱 끼고 나가더라니까.
그래서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처음 보는 낯선 남자와 단 둘이 있어. 정말 단 둘이냐고? 평일이니까. 평일 오후 3시에, 그것도 시청 뒤편, 어느 누가 카페를 찾아 오겠어. 아무리 유명한 카페라지만 말이야. 나도 내가 이렇게 평범한 요일에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시간에 서울에서 이름 꽤나 날리는 카페에 앉아 있는 게 믿겨지지 않아. 회사? 내가 말 안 했던가, 회사는 그만뒀어. 역시 나는 회사 체질은 아닌 것 같아. 그런 체질이라는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래. 다들 물론 현실에 못 이겨 다니겠지만 말이야. 내 전 직장이 생각난 김에 이 남자에게 물어보긴 해야겠어.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평일 이 시간에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 이런 사소한 것이 궁금한 것 보니 억지로 끌려 나온 소개팅 치고는 괜찮은 것 같아. 생각보다 부담스럽진 않아. 원래 인연의 시작은 무한한 궁금증 아니겠어? 그런데 이 남자, 아까부터 자꾸 안절부절 하는 게 어딘가 좀 불편해 보이는데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저, 커피 안 시키셨는데, 뭐 좋아하세요?”
내가 그랬나? 나는 당연히 내 앞에 있는 커피잔이 내 거인 줄 알고 있었네. 정말이지 생각도 않던 소개팅 같은 거 하려니까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었나 봐. 어떡하지, 알지 모르겠지만 이제 나, 이제 커피 안 마시거든. 싫어지기도 했고. 그 땐 참 몰랐는데, 쓴 맛이 마치 사약 같잖아. 도대체 사람들은 그런 쓴 물이 뭐가 좋다고 마시는 지 알 수가 없어. 게다가 또 무슨 커피의 종류는 그렇게나 많은지. 커피 만들던 내가 이런 소리 하니까 조금 우습지? 알아, 그렇지만 자세한 건 묻지 말아줘. 언젠가, 조금 더 편해지면 말할 테니까. 그나저나 이 남자 나 계속 빤히 보는데, 어떡하지?
“여기, 유명한 커피 있는데…”
비엔나 커피요.
소연이가 분명히 나 커피 좋아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않는다고 이 사람에게 말했을 거야. 큰일이네. 그런 와중에 비엔나 커피를 시키겠다고 하는 내 꼴이 얼마나 우스울까. 분명 이 사람, 속으로는 나를 엄청 비웃고 있을지도 몰라. 자꾸만 상대방 속을 생각하려니 내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아. 손끝이 또 저리네. 달콤한 핫초코 한 모금 마실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 이상하게, 이 남자 웃는데? 아니, 비웃는 건가?
“비엔나 커피 좋아하세요?”
아이쿠. 잘못 짚었어요, 이 사람아. 이 남자도 나처럼 소개팅은 소질에 없는 사람인가봐. 내가 하는 것보다 더 숙맥처럼 구는 걸. 그래도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그럼요. 이 카페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비엔나 커피죠.”
너무 올드한 말투였던 것 같아. 알아, 아니까 제발 그만 웃어, 이 남자야.
“다행이에요. 커피 안 좋아하시고 마시지 않는다고 들어서 내심 걱정했었거든요.”
소연이도 그렇고 이 낯선 남자도 그렇고, 왜 나에게 이곳에서 보자고 한 걸까? 가만 보니 이 남자 변태적 성향이 좀 있는 것 같아. 어떻게 아냐고? 자꾸 날 보면서 실실 웃잖아. 조금 음흉한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어쩌겠어. 처음 보는 남잔데. 소연이에게도 소연이 남자친구에게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남자에게도 조금 미안하지만 내가 보는 첫인상은 십중팔구 맞아 떨어졌어.
드디어 내 것도 나왔네. 나는 사실 커피보다 이 크림이 좋더라. 그래서 티스푼으로 먼저 몇 번은 떠 먹고 난 후에 남은 크림을 커피에 녹여 천천히 음미하며 먹어. 혹시 당신도 기억났어?
우리, 참 많이 왔던 곳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