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한 파리 1
파리는 도도한 도시였다. 감히 파리를 평가하자면 그랬다. 유럽 국가 중 고작 네 나라만 가봤지만 각 나라, 그리고 각 도시들은 모두 그들만의 매력이 있었다. 내가 본 파리는 도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더러운 파리의 길바닥과 구걸하는 거지들, 여행객을 표적으로 삼는 집시들의 도시라며 파리를 깎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내게 파리는 그 흔한 문화와 예술의 도시도 아니었고 유럽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도 아니었으며 그저 볼수록 매력 넘치는 '도도한' 도시였다.
낮의 파리와 밤의 파리는 다를 게 없었다. 어느 시간 때든 간에 충분히 아름다웠고 오히려 잠에 빠지기 아까운 24시간이었다. 내게 체력이 허락된다면 나는 24시간의 파리를 즐겼을지도 모른다. 다만, 생각보다 일찍 닫는 술집들 때문에 자정부터 진하게 술 한 잔 걸칠 곳이 없어 아쉬웠다. 여름이라면 자정이 넘어서까지 즐길 수 있는 곳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겨울의 뤽상브르 공원은 비록 덜 푸르렀지만 녹음이 짙을 여름이 기대되는 곳이었다. 그 곳은 파리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공원 중 하나라고도 했다. 낮에 유명한 마카롱 집에서 마카롱을 사고 마트에서 와인 한 병을 구매하여 뤽상브르 공원으로 가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사실 달디 단 마카롱과 역시 달달한 맛의 와인은 잘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리에는 무수히 많은 와인들이 너무나도 싼 가격을 뽐내며 매대에 즐비하게 놓여있었고 나는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대신 모험심을 가지고 마음 편히 아무 와인이나 한 병 들고 오면 되었다. 세느 강 변의 바토무슈를 타는 곳 또한 새벽을 지새기 좋은 곳이었다. 겨울은 다소 찬 강바람에 안면이 얼어 사진을 위해 미소 짓기도 힘들긴 하지만 여름은 외려 시원할 듯 했다. 고개를 살짝만 돌리면 보이는 에펠탑이 밤을 더 아름답게 해줄 것만 같았다. 매 정시마다 반짝이는 에펠탑을 보며 마시는 술은 아마 안주 따위 필요 없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비 오는 날을 싫어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나를 실내에 묶어두기에 충분했다. 나빠진 환경 탓에 사실 지구촌 전역에서 내리는 비는 산성비였고 그래서 더욱 맞는 것을 꺼려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달랐다. 처음 유럽에 발을 담근 곳은 영국 런던이었다. 우연치 않게 그 때도 1월 말 즈음, 즉 겨울이었고 겨울의 그 지역은 비가 종종 내렸으며 해가 빨리 졌다. 처음 비를 맞던 런던에서의 아침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색했고 불편했지만 런더너들과 달리 우산을 펴고 걷는 내 모습이 더욱 어색했다. 나는 과감히 우산을 접었고 이후 야상을 입고 야상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 쓴 채 당당히 걸었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런더너들에게 동화되었고 비 오는 거리가 아름답게 느껴졌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겠지만 '미드나잇 인 파리'에는 유명한 말이 있다.
파리는 사실 비 올 때가 제일 아름답죠.
런던에서 느꼈던 그 감정을 잊고 살았었다. 파리에 와서 다시 깨달았다. 비 오는 유럽은 아름답다는 것을. 아니, 비 오는 파리는 황홀하다는 것을.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비가 좋다며 맞고 돌아다닌 나는 옛 속담대로 코트가 젖는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가 결국 된통 감기에 걸렸고 여행 내내 감기를 달고 살았다. 어쩌면 낯선 곳에 와 너무 긴장을 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보다 다소 추웠던 파리를 힘든 줄 모르고 시차 적응도 하지 않은 채 돌아다니고 그만큼 그 도도한 매력에 빠져있던 나를 누가 말렸겠는가. 물론 몸도 으슬으슬했고 비 오는 파리는 아무래도 돌아다니기는 조금 불편했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서 나름의 머리를 썼다. 비가 그치고 거리를 보자. 환상이었다. 야경을 찍겠다던 한 친구를 따라 나선 나는 비 온 뒤의 파리 야경에 이미 취해있었다. 술이 필요하지도 술이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 어떤 물리적인 것 없이 나는 충분히 취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눈과 마음에 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겠지만 나 혼자 보기에는 아까운 야경이었다. 비 온 뒤 울퉁불퉁한 파리의 거리가 촉촉히 젖어 도시의 불빛을 머금은 그 모습은 정말로 장관이었다. 형형색색이 아니라도 좋았다. 가로등의 주황빛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지나가던 길에 보인 호텔 건물은 파란 빛도 있었고 붉은 빛도 가지고 있었지만 빛은 색깔은 상관 없었다. 모든 빛을 머금은 빗물 가득한 바닥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 날은 파리에서의 마지막이 며칠 남지 않았던, 아쉬움이 커져만 가던 며칠 밤 중 하루였다.
단순한 여행기를 쓰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나는 이런 곳을 다녀왔다며 나열하는 식의 글은 여행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것은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를 위한 또 앞으로 여행과도 같은 삶을 살아갈 모든 이를 위한 '나에게 쓰는 편지'가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