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만났더라면, 혹은 만나지 않았더라면.

사랑이 넘치는 피렌체, 번외편3

by 리아

마트에는 다양한 식료품이 가득했다. 나는 와인 코너로 가 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와인들을 한참 보았다. 병이 아닌 우유팩처럼 생긴 종이 팩에 든 와인이 눈에 띄었다. 와인을 가지고 언덕으로 올라가 혼자 마실 생각을 했지만, 내심 와인 병을 어떻게 따야 하나 걱정했다. 그런데 웬걸, 종이 팩에 든 와인이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한 번 더, 와인의 가격에 놀랐다. 혹 이 가격의 이 종이 팩에 든 것이 와인이 아니라 포도 주스가 아닐까도 의심했다. 알코올 도수가 기재된 것을 보고 나서야 이렇게 싼 값의 와인이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나를 집어 들어 계산대로 가져갔다. 다른 안주는 필요하지 않았다. 가장 해 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바깥 어느 곳에서 좋은 풍경을 바라보며 홀짝홀짝 와인을 마시는 것이었다. 비로소 해외 여행 중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를 이룰 수 있는 시간이 다가왔다는 생각에 마냥 설렜다. 마트에서 나와 서둘러 발걸음을 뗐다. 미켈란젤로 언덕까지 걸어가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여행을 하며 수 없이 많이 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 위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는 피렌체이므로 나는 반드시 오늘, 이 시간, 이 순간에 노을을 봐야만 했다.

한참을 걸었고 마침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이 보였다. 미켈란젤로 광장이었다. 두오모를 처음 본 순간만큼이나 설렜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그런 것인가 보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방에서 와인이 담긴 종이 팩을 꺼냈다.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둘러보며 나와 같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찾아보았다. 음악이 필요했지만 여기서만큼은 이어폰을 끼고 홀로 듣는 노래는 당기지 않았다. 삼삼오오 몰려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에 비해 나는 혼자였고 이상하게 한없이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생각해보니 종이컵조차도 준비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종이 팩 채로 들고 와인을 맛보기 시작했다. 적당히 달았고 적당히 취기가 올라왔다. 마침 기다리던 순간이 오고 있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저 멀리 보이는 두오모 지붕의 색으로 변했다. 실눈을 뜨고 바라보니 저녁놀이 물든 하늘에서 두모오 지붕을 찾는 것이 어려웠다. 점점 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워져 가는 와인 때문인지 와인처럼붉어진 저녁 하늘의 아름다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기분 좋은 나른함이었다.

보고 싶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목적어는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서 대체 무엇이 보고 싶은 것인지 나 자신도 몰랐다. 어쩌면 이것은, 이런 분위기에 취한다면 누구나 느낄 법한 그런 대상 없는 그리움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녕?”

나의 혼잣말에 답이라도 하듯 누군가 내게 인사를 했다. 두오모 지붕을 가리며 내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아까 베키오 다리에서 만난 파란 눈의 외국인이었다. 두 번 째 만남은 늘 그렇듯 경계심을 풀게 만든다. 나도 모르게 싱긋 웃으며 안녕, 이라고 답했다. 그는 그런 나를 보고는 앉아도 되냐는 말도 없이 내 옆에 털석 주저 앉았다. 외국인들의 한국인과는 확연히 다른 친화력. 인정했다, 이렇게 직접 겪고 나서야.

“여기서 와인 먹는 거, 놀라워요. 좋아해요, 나도.”

외국인들은 늘 우리와 달리 동사를 먼저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한 습관에 내가 종종 놀라고 또 가끔은 설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것은 어느새 반 이상 비운 와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나는 멍하니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내게 눈을 맞추는 듯 하더니 고개를 돌려 거의 사라져 버린 노을을 바라보았다. 우스웠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한국 사람들에 신물이 나 도망치듯 외국으로 온 나였음에도, 친절한 외국인과 그들의 마음을 외면하기만 했다. 한심했다. 더 이상 둘이기 싫어 혼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외로움에 적응하기에는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른이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갔다. 곧 짙게 어둠이 깔렸다. 나는 말없이 남은 와인을 마시며 서서히 불이 켜지는 피렌체를 감상했다.

“밥, 먹었어요?”

파란 눈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여전히 앉아 있는 나를 보며 무심히 말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 저었고 그는 아까처럼 싱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티본 스테이크를 한 접시 더 먹을지도 모른다는 기분 좋은 불길함이 뇌리를 스쳤다. 지금이 지나면 누군가 내게 손을 내미는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카메라를 꽤 오래 쥐고 있었는가 보다. 맞잡은그의 손은 거칠고 투박했지만 따뜻했다.

잡아 줄 누군가가 필요했는가 보다. 나는 그를 따라 미켈란젤로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해가 완전히 사라져 캄캄한 어둠이 피렌체 전역을 덮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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