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한 파리 6
천성이란 것이 있을까. 천성이 게으른 사람이라며 쉬는 날이면 마냥 늘어지기만 했던 나는 여행을 떠나 나의 본성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할 수 있었다. 사실 천성이라는 건 없다고 본다.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이나 환경에 젖어 들어 생긴, 분명 내 스스로 만든 ‘나의 모습’인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고 침대에서 꼼짝 않는 것을 제일 좋아하던 내가 여행만 가면 밤잠도 아침잠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 날도 그랬다. 분명 전날 하루 종일 이루어진 투어 때문에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베르사유를 다녀오기로 한 약속 때문에도 그랬고 또 다른 근교를 간다는 생각에 일찍 일어났다. 물론 늘 하루를 든든하게 시작하기 위한 조식 때문에 이른 시간 기상을 했었지만 말이다. 나는 늘 약속을 잘 지키는 아이였고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코리안 타임’이었기 때문에 약속 시간 10분 전에 도착하는 습관을 들였다. 그런 걸 보면 또 그렇게 내가천성이 게으른 사람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여행지에서의 약속은 나 자신과의 약속 외에는 거의없었다. 한 달 여행을 시작한 지 며칠 밖에 되지 않아 나와의 약속도 많지는 않았고, 한인 민박에서 만난 인연들 덕에 나와의 약속만큼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이 많았다.
스치는 인연일지라도내게 ‘약속’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스치는 인연이고 싶지 않아서 그들과의 약속을 소중하게여기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와 반대로, 그 사람과약속을 잡고 또 그 약속을 중히 여김으로써 대단한 인연을 만들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많이 피곤했다던 어린 친구가 조금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베르사유에 도착한 시간은 그렇게 이르지 않았다.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식겁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줄이 줄어들었고 금새 입장 할수 있었다. 기다리며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함께라서 더 즐거웠다. 무려 왕복 네 장의 까르네를 써서 도착한 베르사유 궁전은 정말 화려함의 끝이었다. 이곳은 아마 그 시절 국민들에게 꿈의 공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그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방을 건너갈 때마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리나라 역사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몇 년 전 한국사 공부를 하고 한국사 자격증을 땄던 나는 원래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뿌리는 공부하자는 다짐으로 한국사만을 겨우 공부했고 역시나 세계사는 뒷전이었다. 그래서 알지 못했다. 끝없는 입시를 위해 13년 간 공부했던 그 기간이 질려 더 이상 공부라고 생각되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도 멍청한 핑계에 불과했다. 그런 굵직한 세계사의 사건들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내가 한심스러웠다. 방마다 많은 볼 것이 전시되어 있었고 그 방을 둘러보던 도중 알게 되었다. 꿈의 궁전일 것만 같았던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가 버리고 도망친 곳이었고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늘 그렇듯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 속에는 언제나 아픔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힘든 날이면 내 모습을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한껏 치장하고 외출하는 나만 해도 그러했다. 그냥, 다른사람들에게만큼은 멋진 모습이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닐까.
멋있다며 감탄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화려함을 칭찬하며 사진만 찍어대며 수많은 방을 지나온 내 자신이 매우 한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멋진 사냥을 꿈꾸며 베르사유 궁전을 지은 왕족의 꿈이 많은 백성들에게는 안타까운 현실이었음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나에게 꿈은 생각만으로 상상만으로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실현시키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또 그저 헛된 꿈으로만 남은 것들이 많았지만 나는 쉽게 꿈을 꾸는 아이였고 반드시 이뤄지지 않는다 해도 꿈꾸는 시간을 행복이라 여겼었다. 그러나 어렵게 산 수많은 백성들이 그랬듯, 어떤 이들에게 꿈은 사치이고 잔혹하게 다가오는 현실일 수 있었다. 여유롭게 꿈꾸는 시간을 즐겼던 나와 달리 다른 누군가는 그런 꿈을 꿀 생각조차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꽤 큰 규모에 궁전 내부만 구경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고 허기가 진 나와 독일에서유학 중인 동생은 궁전 내부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늦은 점심을 하기로 했다. 배고픔에 너무 이것 저것담았나 싶었지만 그래도 야무지게 다 먹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식사 시간은 그 사람을 조금 더 잘아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이 친구와 단 둘이 관광지 내부에 있는 카페테리아, 그렇게 멋진 레스토랑도 아니었고 맛있고 유명한 음식과 함께 했던 것도 아닌 꽤나 평범한 식사는 정말 잊을 수가없었다. 그냥 나보다 무려 네 살이나 어린 이 친구가 마음에 들었다. 비단 내게 먼저 다가와주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타국에서 혼자 공부하고 있는 게 대견스럽고 부러운 면도 있었다. 늦은 점심을 하며 나 또한 며칠 새 편안해진 마음 때문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수 있었다. 좋았다. 두어 달 분명 지인들과 만나면 자주 꺼내던 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다른 기분이었다.
어디를 가고어떤 것을 보고 또 무얼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깨달았다. 누구와 함께 한다는 것은 세상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제일 값진 것이라는것을.
궁전 밖 정원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이탈리아 양식으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정원을 다 돌아보기에는 체력이 전혀 따라줄 것 같지 않았다. 전날 온 비 때문에 바닥도 질척거렸고 이미 궁전 내부 보는 데에만 체력을 다 쓴 우리는 그냥 화끈하게 궁전바로 뒤에서 구경만 하기로 했다. 어디든 나무가 많은 곳은 여름이 더 아름답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은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 당해서인지 녹음이 짙지 않은 겨울이라도 멋있었다. 왕궁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보아도 웅장함에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사람들에게 ‘크기’란그런 것이었다.
늘 내 얼굴이 가장 예쁘게 나오는 사진만을 고집했었다. 함께 다닌 이 동생은 항상 자신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나도 그렇게 찍은 사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몰랐던 내 뒷모습을 나는 그렇게 여행지에서 보게 되었다. 타인만 보던 내 모습을 내가 본다는 것이 어딘가 신비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