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범죄에 관하여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돼?”
잘 지내냐는 내 안부 인사에 P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몇 년 전 헤어진 연인이 며칠 전부터 갑자기 다시 만나자고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시 만날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지만 지금 그는 막무가내라고 했다. 밤늦은 시각 야근하고 돌아오는 P의 집 앞에 자꾸만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나기도 하고, P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계속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다시 만나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 구애와 스토킹 사이
연애는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식어서 헤어지자고 하면 더는 연애가 아니게 된다. 이별을 고한 상대방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없다. 이별의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혼자서 계속 연애 상태에 머문다면 어떻게 될까. 한두 번 정도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연락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사실 누구나 헤어진 연인에게 실수로 내지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연락을 해보곤 하니까). 그렇지만 상대방이 거절하거나 연락을 받지 않는데도 이별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만나달라고 전화를 받을 때까지 끊임없이 전화를 하고, 협박을 하고, 만나기를 거부하는 사람 앞에 자꾸만 나타나고, 쫓아다니고, 붙잡아 앉혀두고 자기 하소연을 하고, 용서해달라고 일방적으로 비는 것은 문제다. 그 모든 것은 상대방을 괴롭히는 일이다. 결코 구애의 방식이 아니다.
사귀던 사이가 아닌 관계에서도 ‘구애의 기술’이랍시고 스토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우리는 사귀는 사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상대방에게도 나를 좋아할지 말지에 대한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스토킹 정도의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종종 이러한 착각은 발생한다. ‘내가 쟤를 찍었’으니 ‘쟤는 곧 내 것’이 될 것이라고 망상하는 경우 말이다. 상대방을 교섭의 상대가 아니라 구입 내지 쟁취의 대상인 물건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을 효과적인 연애의 기술로 여기는 것 같지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는 상대방의 인격과 자기결정권을 부인하는 행태이다. 연애 상대방을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연애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연애란 동등한 사람이 자유롭게 교섭하여 관계를 형성하기로 하는 약속인데, 상대방을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는 관계를 과연 연애라 볼 수 있을까.
■ 명백한 범죄인 스토킹, 지속적 괴롭힘
상대방은 만나기 싫다는데도 지속적으로 만나달라고 요구하거나, 따라다니고, 몰래 숨어서 기다리고, 사귀자고 요구하는 행위를 ‘지속적 괴롭힘’이라고 한다. 지속적 괴롭힘은 경범죄 처벌법에 의해 1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科料)의 형을 받는 범죄행위다(이마저도 2012년에야 경범죄처벌법에 처벌대상으로 규정되었다). 그렇지만 처벌의 강도가 피해자들이 경험하는 공포에 비해 너무 가볍다. 경찰에 신고해도 순찰을 강화해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신고를 해서 경찰이 그를 잡아가봐야 8만원 정도의 벌금 처분을 하거나 그저 훈방처리되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면 오히려 가해자에게 용기를 주게 될까봐 신고 자체를 꺼리는 사람도 있다.
스토킹이 ‘구애의 기술’이라는 사람들…
상대 인격·자기결정권 부인하는 행태, 이걸 과연 연애라 볼 수 있을까
거절하는데도 끊임 없이 만나달라거나, 따라다니거나, 숨어 기다리고,
사귀자 요구하는 행위는 ‘지속적 괴롭힘’
‘경범죄 처벌법’ 있지만 8만원 정도의 벌금·훈방처리 다반사…
피해자 공포에 비해 너무 가벼운 처벌
스토킹범죄 처벌 법안 여러차례 발의 됐지만
‘지지부진’ 여전히 법의 사각지대에
스토킹범죄는 강력범죄의 출발점으로 인식하고 심각하게 다루어야 한다. 비슷한 사례로 형법은 똑같은 주거털이범이라도 낮보다 밤에 침입해 절도를 하는 사람을 더 무겁게 처벌하고 있다. 야간에 주거침입절도를 하는 사람의 경우 심리적으로 더 긴장해 있는 상태이고, 집에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단순 절도범에서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는 강도나 강간범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낮보다 더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스토킹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쉽게 자신의 의지에 부응하지 않는 피해자에게 강력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 있다. 굳이 어려운 심리적 분석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피해자가 싫다는데도 계속 쫓아다닐 정도로 피해자에게 집착하고 있는 가해자의 병적 상태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스토킹범죄 처벌을 위해 이미 15대부터 19대 국회까지 여덟 차례나 법안이 만들어졌지만 모두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다. 20대 국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섯 개의 법안이 발의되었지만 제대로 검토된 의안이 하나도 없다. 스토킹범죄로 인한 누군가의 죽음이 기사에 등장할 때 반짝 법안들이 발의될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스토킹범죄는 여전히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잦은 등장, 반복되는 연락 때문에 정신적으로 심각한 공격을 받고 있지만, 이를 제대로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3221611005&code=940100#csidx380cfcafe61acbeaf07889d41b58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