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을 타고
책을 펼친다. 마치 해리포터의 기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펜시브에 들어가는 것처럼 몸과 마음이 빨려 들어간다. 전 세계의 어딘가로, 어떤 시간이든 원하기만 한다면 그 시간으로 순간으로 향한다. 물리적인 이동은 아니지만 의식은 시공간의 축과 무관하다. 그렇게 책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 런던의 가난한 소녀가 되기도 하고, 조선시대 양반의 내면에 깃들기도 한다.
이 타임머신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홍길동전을 읽으면서 조선시대의 양반사회와 서자의 슬픔, 가난했던 백성들과 대비되는 양반들을 마주할 수 있지만 그 이야기를 그들의 시점으로만 보지 않고 21세기의 시각으로 그 이야기를 해석한다. 홍길동의 서자 차별이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사회 질서였다면, 오늘날 독자들은 평등과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그를 바라본다. 지금은 당연하지만 그때의 시대상황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보며 지금과 그때를 비교하고 부딪히고 알아간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소설은 변화한다. 언젠가의 전래동화부터 조선시대에서부터 출발해 현대사회까지의 소설들은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나라가 어떤 변화를 맞이했는지, 어떤 삶 속에서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신분에, 성별에 가로막힌 당찬 여성의 모습으로, 이제는 늙어 힘이 빠진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시대 상황마다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변화를 보여준다. 또한 시간이 걸러낸 언어들의 변천사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한문투의 문어체에서 일제강점기의 번역투 문체 그리고 현재의 일상어에 가까운 문체까지. 언어의 변화는 단순히 표현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런 변화는 문화권에 따라서도 다르게 나타난다. 서양 소설에 등장하는 미사여구들은 우리나라 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궤를 그린다. 우리나라였다면 그저 "입구에서부터 옛 할머니의 냄새가 풍겨오는, 널찍한 마당에서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듯한 고양이 한 마리가 지키고 있는 집에 들어갔다"로 끝났을 집에 대한 간결한 묘사는 "파란색 철문과 그 옆, 이제는 읽기를 포기해 버린 한자로 쓰여있는 집 문패를 지나 문을 열면 된장을 말리면서 오는 곰팡이 냄새와 어린 시절 뛰놀던 마당의 한가운데 정식으로 들인 적은 없지만 어느새 집주인 행세를 하게 된 검은색 길고양이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빛나게 될 눈동자로 우리들을 쳐다본다."가 된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구성한다. 소설은 이런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가장 정교하게 충족시키는 장치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삶들을 간접적으로 살아본다. 전쟁터의 공포, 궁정의 음모, 사랑의 환희와 절망을 책을 펼침으로써 일어난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일어나는 일은 매우 특별하다. 3분짜리 쇼츠 영상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2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진 사람이 갑자기 오래 끓인 갈비탕을 맛보는 것과 같다. 시간이 흐르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는 한 인물과 함께 몇 시간, 때로는 며칠을 보내며 그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관찰한다. 이런 경험은 일상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가족이나 친구조차도 이렇게 오랫동안, 이렇게 깊이 들여다볼 기회는 없다. 소설은 우리에게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합법적 방법을 제공한다.
결국 소설이라는 타임머신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장 큰 선물은 '나'라는 좁은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다. 우리는 평생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자신의 감정으로만 느끼며, 자신의 시대와 사회적 배경 안에서만 사고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순간, 우리는 잠시 이 제약에서 해방된다. 조선시대 기생의 마음으로 사랑을 느끼고,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절망을 경험하며, 현대 청년의 고독을 공감하게 된다. 이런 경험의 확장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해준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복잡하고 깊은 내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한층 너그러워진다. 소설은 어쩌면 우리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드는 가장 은밀하고도 확실한 방법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