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견문록

by 거의모든것의리뷰

활자 중독까진 아니지만, 책은 좋아한다. 흰 도화지에 박혀있는 활자들이 그려내는 이야기들이 무한한 가능성을 그려낸다.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같이 허무맹랑하지만 소년과 소녀들이 꿈을 꾸게 하는 이야기, 셜록홈스처럼 난제를 해결하는 탐정이 되어가는 이야기가 있다. 해리포터보다는 현실성이 있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게 한다. 알랭드 보통의 책처럼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감정들을 아주 깊게 파고드는 이야기는 내가 몰랐던 나의 감정을 어떻게 나보다 이렇게 더 잘 풀어낼 수 있는지 감탄을 금치 못한다. 결론 없이 정의를 이야기하는 마이클 샌델처럼, 답을 주지 않아도 질문 자체가 충분한 이야기들. 손안에 들어오는 적은 가능성들을 좋아한다. 그게 책이라는 물건이 가진 이상한 힘이다. 이렇게 얇고 가벼운 것이 사람을 어디로든 데려갈 수 있다는 것


"띵, 6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동복들이 즐비한 곳들을 지나 교보문고에 들어선다.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이어폰과 키보드, 가습기를 판매하는 곳이지만 세발자국만 더 들어가면 냄새가 바뀐다. 종이와 목재와 에어컨이 섞인, 서점의 세계로 비로소 들어선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은근히 빽빽하지만 평일은 그나마 한산하다. 알록달록하고 푹신한 아이들 공간에는 그림책을 펼쳐든 아이 하나가 엄마 무릎에 기대어 앉아있다. 아이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그림을 보고 있다. 그게 더 정직한 독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그 코너를 지나면 나무 서랍장 위에 책들이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선물 꾸러미처럼 쌓여있다. 베스트셀러 진열대는 가볍게 스쳐 지나쳤다. 어차피 손에 들고 있는 책 중 하나가 저기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딱히 살 책을 정하고 온 건 아니라서 진열대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행위는 소개팅과 조금 닮아있다. 제목이 첫인상이고, 표지가 외모고, 뒤표지 소개글이 자기소개다. 끌리면 집어 들고, 아니면 내려놓는다. 상처받는 사람은 없다.


한국 소설, 일본 소설, 외국 소설을 지나가다 몸은 그대로 둔 채 다시 발걸음만 되돌린다. 옛날에 어디선가 들었던 책이다. '혼모노'. 단편 소설이라는 점을 떠올린 채 일단 책을 집어든다. 후보 1. 경제 경영, 주식 투자에서 '이토록 사적인 경제학'을 발견한다. 누가 제목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말에 한국은행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면 사짜스럽지만 누구보다 공적인 경제학일 것이 분명하지만 제목 때문에 후보 2 등극. 심리학, 마케팅, 인문, 역사 코너를 지나갔지만 이쁜 선물포장지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마주한 베스트셀러에서 마지막 후보 3을 골라 의자로 가져간다.


테이블 자리는 이미 누군가의 차지였다. 노트북을 펼쳐놓은 사람, 형광펜을 손에 쥔 사람,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있는 사람. 서점은 책을 읽으러 오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냥 앉아 있어도 되는 몇 안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의자만 덩그러니 놓인 자리에 앉았다. 냉기가 아직 남아있었다. 아직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였다.


가장 끌렸던 '이토록 사적인 경제학'을 집어든다. 사적이라기엔 단정했다. 개인적인 입장은 있었지만 사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자고로 사적이라면 코스닥 레버리지 2배를 말한다던지, 반도체 지수 3배 정도는 말해야 사적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기회비용을 시작으로 포트폴리오를 강조하는 쉽게 쓰인 교과서였다. 가장 중요하지만 잘 신경 쓰지 않는 그런 과목 말이다. 뭐 그래도, 그 자리에서 다 읽는 건 성공했으니 재미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이 책의 독자는 나처럼 경제학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안 하는 사람일 것이다. 책은 그 사람들에게 조용히 말한다.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하라고.


다음은 혼모노, 단편소설들의 조합이었는데 가끔 소설들을, 비문학에 사로잡힌 나머지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의 관점에서 살펴보려 하는 습관을 바라보곤 한다. 이번 소설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런 건 없었을 텐데 말이다. 아니, 있었는데 내가 모르는 걸 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지만 나의 관점에서 보이지 않은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꼭 나 일 필요는 없지 않나? 가 결말이었다.


책 두 권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나머지 한 권은 손에 든 채 계산대로 향한다. 두 권은 안 샀지만 마지막 책은 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남아있었다. 아무것도 시키지 않아도 되는 스타벅스에서도 꼭 아아 한잔을 시키는 것처럼 꼭 한 권은 사게 된다. 과연 남은 한 권의 책이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재미있어라.


책을 받아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며 생각했다. 서점은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살 것 같은 기분을 파는 곳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기분을 샀다. 손에 든 책이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살 때만큼은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걸로 충분한 날도 있다.

작가의 이전글착한사람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