ㅋ - 커리어

시간 순삭

by 거의모든것의리뷰

대학교 3학년 겨울, 나는 반도체 개론 수업을 신청했다. 우리 과뿐만 아니라 내 기준에서는 전혀 반도체를 하지 않아도 될, 기계공학과나 생명공학과의 학생들로도 가득 채워진 수업이었다.


대학은 상상했던 대학의 모습은 아니었다. 1학년과 2학년때까지는 '논다'라는 주제와 걸맞았지만 3학년부터는 다들 하는 취업 준비의 일선에 내던져졌다. 가고 싶은 기업의 목록을 만들면, 그 기업과 연관된 수업을 듣고, 관련된 동아리에 가입하고, 필요한 자격증을 취득했다. 스펙을 쌓았다.

이력서를 쓸 때마다 나는 스스로가 납품되는 부품처럼 느껴졌다.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진심도 아니었다. 어떤 심화 공부를 한다기보단 취업을 위한 사관학교가 된 것 같았다. 딱히 순수한 학문의 길에 뜻을 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공장에서 스펙이 찍혀 나온 상품이 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입사했다.

입사 후 첫 주, 팀장님이 말했다.

"커리어를 잘 생각하고 일해야 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그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커리어. 나는 아직 내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어떤 일이 나한테 맞는지는 더더욱 몰랐다. 그런데 커리어를 생각하라니.

지도도 없이 낯선 도시에 내려놓고, 제일 빠른 길로 가라는 말처럼 들렸다. 목적지도 없이.


처음 몇 달은 그냥 흘러갔다. 시키는 일을 했고, 모르는 건 물었고, 실수를 했고, 야근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커리어 같은 걸 고민하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다. 아니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는 건 일단은 적응을 한 이후의 일이다.

그러다 어느 날이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업무를 하나 맡았다. 내 방식대로 데이터를 정리하고 사람들에게 공유하는 일이었다. 약간의 코딩이 비슷하게 들어가는 일이었다. 전혀 그 툴을 사용할 줄 몰랐지만 이리 찾고 저리 찾으며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들어냈다. 숫자와 조건들을 맞춰가며 최선의 방안을 찾아낼 때, 묘하게 퍼즐을 맞추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퇴근길에 문득 생각했다. 이런 일을 더 하고 싶다.

처음으로 커리어가 살짝 구체적인 말처럼 들린 순간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하고 싶은 게 생기니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졌다.

퍼즐을 맞추는 것도 좋은데, 사람을 만나고 설득하는 것도 재밌었다. 숫자를 다루는 것도 좋았지만, 어떤 날은 그냥 글을 쓰고 싶었다. 회사 바깥의 일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의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언젠가는 이 경험들을 책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방향이 잡히는가 싶었는데, 오히려 더 넓어진 것이다.


커리어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두 종류로 나뉘는 것 같다.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고민인 사람과,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고민인 사람. 나는 후자였다. 그게 전자보다 나은 건지는 모르겠다. 방향이 없는 것과 방향이 너무 많은 것은, 결국 같은 자리에서 멈춰 서는 일이니까.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를 포기하는 것 같았다. 그 포기가 무서웠다. 그래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로, 그냥 오늘도 출근했다. 너무 많은 선택지들 중에서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갈팡질팡한 채, 하루를 보냈다. 때로는 좋은 기회가 보이기도 했지만 놓치기 일쑤였다. 잘하는 것과 재미있는 것은 또 염연히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익숙해진 이 생활을 포기할 수 있을만한 가치가 있는가?


커리어를 설계하고 목표를 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나는 왜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걸까 싶기도 하다. 5년 후의 나를 그려보라는 말은 수없이 들었는데, 그 사람들의 미래는 선명해 보였는데, 5년 후의 나는 늘 흐릿하다. 미래가 멀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으로 가도 뭔가를 잃는다는 기분. 그 감각이 발을 붙잡는다.


아직 모르겠다. 커리어가 뭔지.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다만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시간이 사라지는 감각, 그 감각이 찾아올 때 놓치지 않는 것. 지금 당장 방향을 정할 수 없다면, 그 감각만큼은 기억해 두어야지 적어도 내가 원하는 방향 중 가장 재미있는 방향임은 분명할 테니까.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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