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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킴 Oct 10. 2023

전력질주하던 나무늘보(1)

각자 제각각의 삶의 속도가 있다. 삶의 속도의 균형을 잃어버린 지난날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의 총량의 에너지와 삶의 속도가 있다.

가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남들의 속도와 에너지에 따라 살다보면 우리는 삶의 균형을 잃어버린다.

재빠른 토끼, 느릿한 거북이, 답답하기만 그지 없는 나무늘보까지 각자의 속도가 있는데 말이다.



올해로 나는 서른여섯, 아니 서른 다섯을 맞이하였다.(윤석열 정부의 만나이로 한 살이 줄어들었다.)

현재는 4개월차의 처음엔 비자발적 백수로 시작했으나 후에는 자발적 백수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중 하나이다. 아직까지는 모아놓은돈이 있어서 올해까지는 이렇게 쉬어갈 예정이다.


언제나 토끼처럼 바쁘게 살아갔다. 시간에 쫓기었고 늘 불안과 초조를 달고 살았었다. 누구나 그렇듯 겉과 속 또한 다른 사람이었다. 늘 하루하루가 버거웠고, 밖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고 돌아온 집에서는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그 모든것은 나무늘보가 전력질주를 하려고 부던히도 애쓰던 시절의 반작용이었다.


태생이 나무늘보와 같이 느긋하고 평온하며 유유자적하던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람이다. 그런 나의 학창시절은 공부는 잘 못하지만 무난한 또래 학생들의 삶이었다. 튀지도 않는 보통의 성적으로 보통의 대학을 진학을 하며, 보통의 친구들과 어울려서 사는 그런 삶 말이다. 하지만 내면은 늘 우울하기 그지 없었다. 가장 친하다던 친구들조차 나의 우울의 깊이가 심해지면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갇혀있는것 같다고 말하며 나를 어려워할 정도였으니까. 그 우울의 내면에는 불안했던 나의 가정사와 경제적 한계도 한몫을 하였다.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스무살의 봄, 나의 부모님은 오랜 별거 끝에 이혼을 하셨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도 한 몫을 했지만, 어머니의 새로운 사람과의 삶에 대한 염원도 톡톡한 한 몫을 했다. 이 당시 나이는 성인이지만 아직은 여린 사고를 가진 내게 두 사람이 주는 스트레스는 이로 말할 수가 없었다. 대학교라는 곳에 입학해서 전국에서 보여든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것조차도 버겁던 시절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주위 사람들과 나를 비교해가며 자격지심을 쌓아왔고, 우울감이 나를 휘감았지만 늘 밝게 웃으며 내 어둠이 주변의 알려지는 것을 불안해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다른 생각이 들지 않게 더 바쁘고, 치열하게 시간을 쪼개어 살았다. 마치 나무늘보가 약삭빠르고 재빠른 토끼가 되려고 내 모든 에너지를 전력질주하는데 쓰는 것과도 같았다. 


아마 그때만해도 나는 <가면우울증>의 상태였을 것이라고 돌이켜본다. 남들이보는 겉모습은 웃고 있지만 속은 울고 있는 아이의 상태 말이다.  


이 버거웠던 삶은 머지 않아 -따돌림-이라는 사람들과의 관계 불신으로 '가면우울증'에서 '피해망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왜 내가 따돌림을 받아야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그 중 한 선배가 했었던 단 한마디 '사람을 너무 믿어서'라는 것이었다. 내 방문 앞으로 나오는 것조차 불안하며, 베개머리 맡에는 조그마한 커터칼을 놓아야만 잠에 들 수 있었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는 다 나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MP3가 없으면 안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로 주변을 차단해야지만 밖에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차라리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 스스로를 죽이는 상상 또한 많이 하였다. 이 증상은 나혼자 감당해낼 수 있는 상태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대학병원의 '정신과'에 갔다. 

입원이 필요했다. 그 당시 아버지의 말로는 담당 교수가 최소 한 달 여동안 입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상태에 따라서 그 기간이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빠는 3일도 못가서 자신이 책임지고 약을 먹일테니 통원치료를 하겠다고 담당 교수에서 말하여서 나를 중도에 퇴원시켰다. 


후에 안 것이지만, 처음 정신과 진료 당시 병원기록이 남게 하지 않게 하려고 아버지는 많은 돈을 들여서 부던히도 애를 썼다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단순한 마음의 감기정도로 생각했다고 이리도 오랜시간 투병하게 될 줄 은 몰랐다고 회상하셨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퇴원후 아버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나의 수면과 식사, 운동, 투약시간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셨다. 그에 응당 응답이라도 하듯 나는 호전되기 시작했다. 하루 두 번의 형형색깔의 알약들을 털어넣으며, 마음의 불안과 초조함도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완전한 피해망상에서는 벗어나긴 어려웠다. 그건 내 안의 자격지심이 치유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담당 교수는 약에 대한 반응이 좋은편이라고 긍정적인 사인을 얘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호전됨은 후에 롤러코스터와 같은 나의 투약과 단약의 이야기의 서막이었다. 


그렇게 기나긴 나의 '정신과'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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