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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킴 Oct 10. 2023

전력질주하던 나무늘보(2)

20대는 나와 나의 삶의 속도를 찾기위해 부던히도 버텨내는 삶이었다.


토끼는 원하는 어느곳이든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다.

거북이는 육지에서는 느리나 자신의 바다에서는 누구보다 빨랐다.


나는 토끼도, 거북이도 아님을 나의 20대 청춘을 바쳐서 알게 되었다.


나는 답답할정도로 아주 느린 나무늘보였다.


나의 정신과 병명은 '조현병'이었다. 


조증과 울증이 반복되는 양극성장애와 함께 더불어 피해망상으로 인한 망상증세도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원체 자존심이 쎈 사람중에 하나였다. '우울증'이라고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조현병'이라고 하니 내 삶은 마지막인것만 같았다. 


'나는 평생 이렇게 피해망상 속에서 살아야 하나. 

이렇게 두려움에 떨면서 개복치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걸까?'


피해망상이 있는 사람에게 세상은 너무나도 두려운 존재 그 자체이다. 모든것들은 나를 향해 차가운 눈초리와 비난과 조롱, 심지어 나를 헤칠것 같다는 생각이 들정도이니 말이다. 집밖을 나서는 순간 세상은 눈뜨고 코베가는 냉혹하고 잔인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자격지심과 함께 이러한 피해망상에 사로잡혔다. 나는 세상과 사회로부터 숨기위해 움츠려들었다. 하지만 내겐 나보다 더 강한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었다. 


따돌림으로 학교를 가기 싫다고 했다. 성인이 되어서 사람과 어울리는게 힘들다고도 했다. 학교로 가는 길에 숨이 막혀 죽을것 같았다. 그나마 MP3가 있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과 나의 삶은 다르다고 느꼈다. 타인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하던 모든 것들을 나는 손을 놓아버렸다. 나는 인생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강의를 듣는것들이 버거웠다. 나는 학교를 자퇴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정 대학을 다니기 힘들다면 휴학을 해도 좋다고 하였다. 그렇게 나는 4년의 대학정규과정을 3번의 대학교 휴학과 함께 거의 9년만의 대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나는 대학을 다닐 당시 부설 대학병원 '정신과'에 통원치료를 했다. 공강 시간에 피해망상이 나를 지배를 할 때면 무작정 병원으로 달려가 담당교수를 찾았다. 앞에서 말했듯 난 자존심이 센 편이다. 약을 먹고 있는 내가 나 스스로가 용납이 되지 않아 의사 몰래 멋대로 단약을 하기도 했다. 이후 증상이 심해져 자살충동도 있었고, 나만의 세계의 갇혀 살기도 했었다. 휴학하던 시기에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도 했었다. 그렇게 롤러코스터처럼 증상완화가 되면 의사 몰래 단약을 하고, 자학적 자살 증상 등이 심해져 정신과 병동에 입원을 하고 다시 투약을 무한 반복하던 암흑기였다. 수시로 담당교수를 찾아가 상담을 요청하고 그 앞에서 펑펑 울고 나오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내가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여기서 니가 학업을 포기하면, 넌 미친년으로 패배자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정상적으로 학업을 마치면 그저 긴 인생 중의 잠시 마음의 감기일 뿐이다."


조현병의 증상으로 온전한 나 자신이 누구인지 까먹었던 시절에 그 한마디는 나의 머리를 '띵~'하고 때렸다. 


그 이후,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휴학을 하는 동안 병원의 입원을 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하기 시작하였다. 멋대로 하던 단약을 더 이상 하지 않고, 꾸준히 약과 상담치료도 받았다. 각종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학업과 병원치료를 병행하여야 했기 때문에 오래 근무는 못했지만, 타인과 서스럼없이 어울리는 법 또한 배웠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겨나고 남들과 비교하던 자격지심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나의 조현병 증상은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나는 대학교를 무사히 졸업을 하게 되었고, 비록 타인에게 나의 병명에 대해서는 누가 알까 함구를 하지만 번듯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 속에서 친하게 지내는 동료들도 생기고 또 다른 세상을 살게 되었다. 


조현병 증상이 호전될 당시, 


'우울감과 자격지심은 도대체 무엇인가?

왜 나는 남들과 다른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일까?

도대체 조현병이 뭐길래 내 삶을 이리도 힘들게 하는걸까? '


라는 물음 속에서 살았다. 담당 교수님은 남들과 뇌의 호르몬이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며 둘러댔다. 그래서 그때부터였다. 각종 심리관련 책과 논문들을 찾아보고 동영상 등도 찾아봤다. 그렇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하나이다.


나는 태생이 나무늘보로 답답할정도로 삶의 속도가 느리며, 특별히 감정이 동요되지 않는 평온한 상태의 사람이다. 나무늘보는 시간당 25cm를 이동을 한다고 하였다. 그런 사람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순간부터 자격지심과 함께 그들의 속도로 살아가다보니 내 마음과 머리가 고장나 버렸다는 것이었다. 모든 관계에 있어서 '거부'도 당할 수 있으며,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아갔다. 나의 마음과 삶의 템포를 알아가는데, 나의 평온을 찾아가는데 나는 나의 20대를 허비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전력질주하던 나무늘보에게 어찌보면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받아들이는 중이다. 나의 능력치에 벗어난 것들을 이루려다보니 마음과 머리가 고장났을 수 밖에 없다며 말이다.


20대를 바치고 얻은 것은 내 능력에 맞춰 살자는 마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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