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던 날들

by 필연

매달 같은 날, 돈이 빠져나갔다.

통장 잔고는 줄었다가 월급이 들어오면 돌아왔다. 연금 계좌에 뭐가 쌓이고 있는지는 몰랐다. 부동산 모기지는 매달 나갔지만, 원금이 얼마나 줄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게 몇 년이었다.

1년이 지나도 삶은 비슷했다. 2년이 지나도 통장은 비슷했다. 자산이 늘고 있다는 건 머리로는 알았지만, 체감은 없었다. 숫자를 보면 조금 올랐는데, 그 조금이 뭘 바꿔주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월급에 기대고, 여전히 지출을 따지고, 여전히 여행 한 번 가려면 계산기를 두드렸다.

이게 맞나, 싶은 순간이 자주 왔다.


주변을 보면 더 그랬다.

누군가는 코인으로 몇 배를 벌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주식 한 종목으로 1년 만에 차를 바꿨다고 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매달 같은 금액을 같은 곳에 넣고 있었다.

조급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내가 하고 있는 건 너무 느리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지루했다. 뭔가 더 빠른 방법이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느린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

조용했던 건 맞다. 변화가 없었던 것도 맞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매달 빠져나간 돈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모기지는 줄고 있었고, 계좌는 자라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멈춰 있던 건 아니었다.


이 시간에 이름을 붙이자면, 침묵의 시간이다.

결과가 보이지 않는 시간.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시간. 내가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시간.

이 시간은 실패가 아니다. 정체도 아니다.

축적이다.

나무가 자라는 걸 매일 보면 아무 변화가 없다. 그런데 1년 뒤에 보면 분명히 자라 있다. 매일은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보인다. 그 사이의 매일이, 축적이다.


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극복하려는 것이다. 버티고, 참고, 이를 악물고. 의지로 견딘다.

다른 하나는 통과하는 것이다. 이 시간이 원래 이런 거라고 받아들이고, 그냥 지나간다.

나는 극복한 게 아니었다. 의지를 가지고 버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 삶을 살았다. 아이들을 키우고, 일을 하고, 가끔 여행을 가고,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자산이 불어나는 걸 매일 확인하며 산 게 아니라, 그냥 살다 보니 시간이 지나 있었다.

견디는 것보다 사는 게 나을 때도 있다. 모든 시간을 의식하면서 버티는 건 오히려 힘들다. 삶을 사는 동안, 시간이 대신 일해주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그 시간이 길다고 느껴지면,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보이지 않는다고 멈춰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이 시간도, 조용히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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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흔들리지만, 구조는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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