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할 때'만 생기지 않는다

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었다

by 필연

해야지, 라고 생각한 것들이 있다.

운동을 시작해야지. 책을 좀 읽어야지. 부모님 여행을 보내드려야지. 영어 공부를 다시 해야지.

머릿속에는 늘 리스트가 있었다. 길지도 않았다.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하면 좋겠다 싶은 것들.

그런데 그 리스트는 줄어들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도 거기 그대로 있었다.


안 한 이유가 있었느냐고 물으면, 딱히 없다.

바빠서도 아니었다. 돈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아직 시작할 계기가 없었다. 딱 맞는 타이밍이 오면,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골프를 쳐볼까 했을 때도 그랬다. 막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해보면 재밌겠다, 정도. 그래서 기다렸다. 주변에서 같이 치자고 하면, 그때 시작하지 뭐. 기회가 오겠지.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있었다.


다이어트는 더 익숙한 패턴이다.

내일부터. 월요일부터. 다음 달 1일부터.

이 말을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시작 날짜를 정하면 뭔가 결심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그 날짜가 오면, 또 다른 날짜를 정한다.

오늘은 약속이 있으니까. 이번 주는 컨디션이 별로니까. 다음 주부터 제대로 하자.

시작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실패한 것도 아니고, 포기한 것도 아니다. 그냥 아직 안 한 거다.


부모님 여행은 조금 다른 무게가 있다.

보내드려야지, 라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따뜻한 데서 며칠 쉬시게 해드리고 싶었다. 올해는 꼭.

그런데 올해가 지나고, 또 올해가 지났다.

부모님은 한 해가 다르다. 작년보다 걸음이 느려졌고, 작년보다 비행기를 힘들어하신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데,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뭘 기다린 걸까. 여유? 시간? 마음의 준비?

돌이켜보면, 기다린 게 아니었다. 그냥 정하지 않은 거였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선택은 무언가를 '할 때' 생긴다고. 계좌를 열 때. 등록을 할 때. 비행기표를 끊을 때. 그 버튼을 누르는 순간이 선택이라고.

그래서 아직 버튼을 누르지 않은 나는, 아직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버튼을 누르지 않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다. 리스트는 그대로였고, 몸은 한 살 더 먹었고, 부모님은 한 해 더 늙으셨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어딘가에 도착해 있었다.


나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아직 선택 안 했어"라고 말했지만, 사실 매일 선택하고 있었다. 오늘도 시작하지 않겠다는 선택. 오늘도 내일로 미루겠다는 선택. 오늘도 여기 머물겠다는 선택.

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었다.

계기를 기다린 것도 선택이었다. 내일부터라고 말한 것도 선택이었다. 올해는 꼭, 이라고 말하고 올해를 보낸 것도 선택이었다.

다만 그 선택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뿐이다.


선택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큰 갈림길을 떠올린다.

이직할까 말까. 이사할까 말까. 결혼할까 말까.

그런 순간은 인생에 몇 번 오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선택은 매일 일어난다.

오늘 30분을 어디에 쓸 것인가. 이번 주말에 뭘 할 것인가. 이번 달에 뭘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시작하지 않을 것인가.

큰 선택이 방향을 바꾸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작은 선택들이 방향을 만든다. 매일,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그 방향에는 이자가 붙는다. 좋은 쪽이든, 아닌 쪽이든.


이건 누구를 탓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도 그랬다. 몇 년을 그렇게 보냈다. "아직 안 한 거지, 안 하기로 한 건 아니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그런데 결과는 같았다. 안 한 거나, 안 하기로 한 거나.

리스트는 그대로였고, 시간만 지나 있었다.


선택은 '할 때'만 생기지 않는다.

하지 않을 때도 생긴다.

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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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우리는, '머무르는 선택'을 반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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