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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잘쓰는헤찌 Oct 08. 2021

여름 사이에 내가 잃어버린 것

대프리카 30년살이가 바닷가도시 1년의 더위를 못 참다니...

싱그러운 풀 내음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여름, 

더운 바람의 공기가 얼굴을 간질간질하게 한다.

“아 뭐 이래 덥노. 이래 더버가 우예 살겠노”

여수의 더위는 도저히 못 참겠다. 

나는 덥기로 유명한 대구시, 

일명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에서도 30년 동안 에어컨 없이 살았다. 

그런데 올해는 너무 덥다. 

짜증이 난다. 바닷가 도시라 습해서 더 힘이 드는 것 같다. 

살이 쪄서 괜히 더 덥기도 하다. 

어딜 가든 신경질적으로 에어컨 온도를 누른다.

 단 10분이라도 에어컨 바람이 없으면 참기가 힘들다. 18도까지 내린다. 


그렇게 찌는 듯한 더위가 한두 달쯤 지났을 때, 

나는 고향에 5일 정도 가서 있었다.

 8월 초의 고향 집은 여전히 에어컨이 없었고, 변한 건 없다. 

심지어 내 방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려본다. 

“혹시 내일 점심에 시간 되나? 내 한 3일 더 있을 낀데”

 친구들이랑 약속을 빡빡하게 잡고는 소파 위에 몸을 눕힌다.

 다리 한쪽을 번쩍 들어서 쿠션 위로 올린다. 

‘ 아 더버죽겠다. 

에어컨없이 우예 잠을 자란 말이고’

결국에는 다시 대구로 올라온 첫날에 모텔을 검색했다. 

숙박 앱을 열고 근처 모텔을 예약하여 바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잠을 청했다. 

그러나 고향 집에 돌아왔는데 계속 모텔로 가는 것이 아까웠다.

 또 여자 혼자의 몸으로 계속 자기도 조금은 무서웠다. 
그래서 내 방에서 적응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후덥지근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리고 잠을 청한 이튿날은 뜬금없이 가위에 눌렸다. 

더위 때문인지 황당하게 잠을 설쳤다.


약속 장소로 이동할 때는 지하철역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댔다.

 그리고 지하철을 이용하였다. 

왜냐면 약속 장소가 주로 골목길이었다. 

그래서 주차하기가 어려웠다. 

차 막힘 현상이 없는 지하철이 훨씬 빠르다. 

그렇게 차를 대고 지하철 입구로 가니 어머나 세상에. 

눈앞의 풍경이 매우 놀라웠다. 

‘계단 와 이래 많노. 걷기 힘든데 그냥 운전해서 가뿌까’

2년 전쯤에 자동차를 산 뒤론 걸을 일이 거의 없었다. 여수는 지하철이 없으니 더욱 걸을 일이 없다.

 내가 대학 강의를 들을 때, 출퇴근할 때 매일 걸었던 이 계단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골로 가는 천국의 계단 같다. 왜 내려가는 길에는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내려가는 걸음이 무릎 연골에 더 무리가 간다는데,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약속했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더 고민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선택하였다. 솔직하게 귀찮기만 했다. 


그렇게 친구랑 놀다가 시간이 훌쩍 흘렀다.

 또다시 무수한 계단길이 펼쳐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돌아와 가방을 던지자마자 대학 동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 니 어데고? 내 여수로 가족 여행 왔다. 

확실히 바다가 있어가 그런가 훨씬 시원하노”

아, 내가 사는 여수가 덥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친구는 시원하다고 한다. 

나는 그 바다가 습하다고 하였는데, 친구는 시원함을 안겨준다고 한다.

 같은 곳을 경험하는데, 생각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


다르게 생각해보니 나는 30년간 에어컨 없는 집에서 잘만 잤고, 

지하철의 빠름에 감사하며 걷는 생활을 잘 했다. 

그리고 지금은 확실히 바다가 있어서 시원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도시, 

여수시에 살고 있다. 


더위도 이렇게 생각하기 나름인가보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그대로의 온도를 느껴보기로 한다. 

가만히 기온을 느껴본다. 그런대로 움직임을 줄이고, 

선풍기 한 대로 여름 바람을 느껴본다. 

그렇게 있으니까 밤엔 꽤 쌀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거실의 베란다와 내 방의 창문을 모두 열어놓으니 

맞바람이 불어 조금 더 시원하다.

 내 팔을 스치는 바람이 무척이나 고맙다. 

이러한 방식으로 더위에 순응하며 지내보기로 한다.


나는 그다음 날도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서 게임도 하고,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여유도 생겼다. 

길게만 느껴졌던 계단이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걸으면 금방 간다. 

빠르게 도착하는 천국의 계단같이 여겨졌다. 

에스컬레이터가 없어도 몇 칸 다리를 움직이면 이내 도착하였다.


5일이 지나고 여수로 돌아왔다. 

덥게만 느껴졌던 햇볕이 꽤 따뜻하게 느껴진다. 

저 햇살 뒤로 펼쳐진 뭉게구름이 선명하게 예쁘다.

 그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삼으며 집에 왔다.

 오자마자 가져온 짐을 정리한다. 

5일간 입은 옷가지부터 세탁기에 넣는다. 

예전 같았으면 에어컨 리모컨을 먼저 찾았을 것인데 말이다. 

그리고 날씨 탓을 했겠지.


환경은 변한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내 생각이 바뀌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더위에 대응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에어컨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일까?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매번 찾아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더위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즉, 최고의 선택보다는 내 선택을 최고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이번 여름 초반에는 더위에 대한 참을성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참을성은 입추가 지난 지금, 

여름 막바지에 들어서고 나서야 되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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